'이 땅 수호신으로 남아야'
'이 땅 수호신으로 남아야'
  • 예천신문
  • 승인 2008.06.0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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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령 예찬(2)

   
  △안승욱(보문면 출생, 감천서 출향)
단종의 귀양지 청령포(영월)의 노송은 열여섯 살의 어린나이에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비참한 귀양살이로 외롭고 고된 나날을 보낼 때에 직접 그 애절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명명된 구불구불하게 올라간 이 소나무는 단종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오랜 연륜의 소나무(6백년 이상)이다.

이들과 함께 석송령은 현존하는 거송 중 트리오를 이루는 문화재적 가치 이상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기를 뽐내지 않고 낮추는  미덕을 가진 듯 흐르는 맑은 물 같이 스치는 훈훈한 바람 같이 자연의 가르침에 몸 바친 그런 삶의 상징이다.

6백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의 숱한 애환을 머금으면서 역사 속에 묻힌 온갖 영욕의 침묵을 간직한 채 어제도 오늘도 비바람을 맞으며 늠름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돌밭에 뿌리를 박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뒤틀려 자란 모습은 눈보라를 견디어 온 불굴의 자세이며 차디찬 겨울을 버티면서 시달리고 싸워온 아픈 상처의 흔적이다.

3백 평도 훨씬 넘는 넓은 흙 돌밭을 하나의 뿌리로 강하게 쥐어 잡고 눈보라 몰아치는 인고를 거듭하기 육백 년이 넘도록 장구한 세월을 모질게도 살아온 석송령은 한국인의 상징이다.

낙엽을 다 털어버린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음은 춥고 배고픔을 견디어 온 올곧은 한국인의 표상이다.

추사(秋史)선생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를 도와준 이상적(李相迪)에게 자신의 당시 처지를 비유한 세한도(歲寒圖)란 발문으로 겨울을 넘긴 앙상한 소나무 몇 그루의 그림을 그려준 것이 오늘날 보물로 보존되고 있다.

한국인의 모습과 닮아 있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소나무를 제일 선호하고 있다. 하물며 석송령은 췌언을 불허하리만치 흡족한 사랑과 보호를 받아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시야를 멀리 할 수없는 도로변 낮은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거송은 으레 거유 명현들의 담론의 장소가 되고 시가(詩歌)의 진원지가 흔히 되었든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아하고 장대한 석송령에서 조금 아쉽지만 풍류적인 사연은 갖지 못했다고 본다.

괜히 엉뚱하게 욕심삼아 한 말일 뿐 지금까지 버텨온 것만으로도 놀랍고 자랑스러운 거룩한 존재로서 소중하게 보듬어 오래 오래 이 땅의 수호신으로 살아남아 있기만 하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이 땅의 소나무를 포함하여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충격적이고 서글프기 그지없는 슬픈 예언을 접한 적이 있기에 다만 기우가 되기를 바라면서 더욱 지혜를 다해 보살펴 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산정송성원(山靜松聲遠)이라는 말처럼 ‘고요한 산의 정적 속에서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그윽함이 있다’라는 글귀에서 맑은 바람 외에는 세속적인 소음을 싫어하는 소나무의 속성을 선(禪)의 경지에서 음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백년 이상을 지탱한 석송령은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석천의 물과 단지 부용봉 계곡 맑은 바람을 들이켜며 돌을 껴안고 자라왔다. 인간에 의한 환경적 요인은 오히려 석송령을 괴롭히고 있다.

우선 석송령 바로 옆으로 통과하는 도로를 개울 건너 제방으로 이설하는 것이 이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시급한 과제라고 감히 제언한다.
  필자는 석송령을 무척 사랑하기 때문이다.

석송령 밑에서 꿈을 그린 한때의 젊은 시절이 있었기에  보은과 감사의 마음으로 진정을 담아 이 글을 쓴다. 〈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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