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누정록 발간의 의의
예천누정록 발간의 의의
  • 예천신문
  • 승인 2010.10.02 0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안승욱 (보문 출생, 감천서 출향)
조선조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있으면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대부가 많이 사는 선비의 고을이다”라는 찬사로 우리고장 예천에 한해 여타지역에서는 하지 않은 기술을 함으로서 오래전부터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왔다.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 전국 팔도를 순례하면서 각 지역의 풍속·역사·사회·문화 등 모든 부면에서 당대 사회를 예리한 시각으로 지적한 그의 저술로서 팔역지 혹은 팔도지리지라고도 하는 조선조 최초의 사회를 그린 사료적인 가치가 충분한 인문지리지이다.

학가산을 한양의 북한산에 비유하여 지금의 도청후보지로 일컫는 풍산지역일원은 수도가 들어설 만한 훌륭한 땅이라고 그 당시에 이미 예언을 함으로서 오늘날의 현실로 적중한 예언가이기도 하고 철학자인 그의 탁견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비마을(하회마을)을 바로 접하여 있고 주자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인근 고을의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이라는 내로라하는 선비촌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에 가려 우리고장은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이름뿐인 선비 고을처럼 퇴색이 되고 선비를 상징하는 추노지향이라는 대명사가 옛말로 여겨지는 것 같은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면면히 이어온 선비정신과 아름다운 전통문화의식을 간직한 사대부 조상들의 담론과 강론의 메시지를 전하는 금번 예천 누정록을 통하여 다소나마 불식됨으로서 선비의 고장이라는 대명사가 조금은 무색하지 않는 것 같은 자위와 함께 반가움이 없지 않다.

우리 조상들의 유산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보다 아름답게 확대 조명함으로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안목을 키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고장을 비롯한 북부지역은 유학의 거봉 퇴계선생의 학풍권에 있었음으로 또한 이 학통의 범주에서 그를 사숙(私淑)하고자 하는 사상이 고을 특유의 정서가 널리 저변에 확대되어 있었음으로 사대부가 많이 사는 선비 고을이라는 말이 결코 우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살아온 우리들 흔적의 편린들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보아 참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자체와 사회 각 기관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문화원형의 발굴을 소재로 하는 문화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는 시대 분위기에서 이에 편승하여 문화를 아우르는 상징적 가치로서 지역사회에 대한 브랜드를 격상하고 품위를 가름할 수 있다는 데서 또 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리 고을에도 퇴계선생에 당당히 대좌되는 조선조의 대학자 한 분을 부상시킬 수 있는 소재가 있다. 철학자이고 정치가이며 실용적 과학자인 다산 정약용을 이름이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결코 먼발치로만 바라 보아서는 안 되는 불세출의 대사상가이다.
필자는 본보를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다산을 논하면서 묻혀 있던 예천에서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그가 머물면서 수학하던 반학정의 위치를 밝히고 복원을 제창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금번 누정록에서 다산의 선몽대기와 반학정기의 시의적절한 등제를 보고 백미(白眉)로 보이는 듯 금상첨화로 돋보였다. 앞으로 사회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이를 찾아서 새로이 융합하고 계승 발전하여 창조해나가는 문화브랜드 시대이다.

금번 누정록 발간에 즈음하여 단순한 화보에 비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문화 산업으로서 역사적인 사건인물로 연계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안목으로 대할 때 그 의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본보 발간에 이르게 된 발상과 잔잔한 여운에 대하여 예천문화원에 심심한 격려를 드리며 본 도정록의 번역위원으로 수고하고 도록을 보내준 김주화 형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졸필에 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