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무속신앙 번창'
'조선시대 때 무속신앙 번창'
  • 예천신문
  • 승인 2010.11.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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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3'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 이야기(20)
지난 호 두 번에 걸쳐 민간신앙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빠진 내용과 불충분한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고려시대에 국교로 번성하였던 불교는 조선시대에는 억압되었으나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되었다. 그러나 금무(禁巫)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다소 제한되었다.

특히 무격(巫覡)을 전달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 활인서(活人署) 등이 있었다. 또한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시대 못잖게 성행하였다.

건국 초 태조는 원단(圓壇)을 한강 서쪽에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하였으며 강화도 마니산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영성단과 노인성단(老人星壇)을 서울 남쪽에 두었다. 태백성은 이성계가 즉위 하기 전에 빌었더니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등극한 뒤 함흥남쪽에 제성단을 만들어 매년 단오절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산신제는 백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밖에도 천신(川神), 삼해신(三海神) 칠독신(七瀆神)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다. 산신과 연관되어 암석신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토착화 되었다.

대표적인 기자암(祈子巖)으로는 경주 금오산의 산아당암과 상사암,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과 인왕산 선바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조선후기에 와서 더욱 성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거나 화전민이었으며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계속되고 콜레라,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나라였으나 이는 상민이나 천민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사람들은 마을 뒷산의 큰 나무와 바위에게 빌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세상이 살기 좋게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민간신앙에 의지하였다.

또 사회 혼란과 불안으로 인해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며 백성들 사이에는 부패한 관료나 정부기관 등이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아가 살기가 어렵게 되자 예언사상과 민간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다양한 속신(俗信)과 귀신도 도깨비도 나타나게 된다.

미명귀(未命鬼)는 원래 시집간 여자가 젊어서 죽은 귀신으로 남편의 후처에게 붙어서 때때로 앓게 하거나 해롭게 한다. 즉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사람에게 붙은 경우로서 악행을 많이 하는 악귀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위령제를 지내주어 미명귀가 되는 것을 예방하였다. 특히 민간의 전설에는 이 미명귀에 얽힌 것들이 많다.

야광귀(夜光鬼)는 천계에 살다가 설날 밤이나 정월대보름날 밤에 인가로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간다고 하여 이날 밤에는 뜰에 있는 신발을 방안에 감추거나 엎어두고 잔다.

이 야광귀에게 신을 잃은 사람은 연중 불길하고 흉사가 있다고 하여 이 귀신을 막기 위하여 뜰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체를 담아 내어 두었다. 6·25 한국전쟁시 나는 말라리아에 걸렸는데도 굿으로 치료하려는 부모님의 일들이 생각한다.

민간신앙은 과학이 발달되더라도 면면히 이어갈 것으로 여겨지며 다음 기회에 또 이야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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