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양성과 언론활동 주도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군사 양성과 언론활동 주도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 예천신문
  • 승인 2010.12.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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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규 선생 >
국가보훈처는 12월 독립운동가로 군사양성과 언론활동을 주도한 미주독립운동 지도자 백일규(1880년 3월11일∼1962년 5월 31일) 선생을 선정했다.

백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며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했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하고 1905년 6월9일 진남포를 출발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에와사탕수수 농장의 고딘 노동 중에도 에와친목회에 가입해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돼 일본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3월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극대화됐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

의거 직후 백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해 양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하며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백 선생은 1912년 네브라스카에 한인소년병학교 간부로 군인을 양성했다. 1913년 7월부터 신한민보의 주필로 항일적인 논설을 쓰며 1915년 상항한인감리교회 엡윗청년회 학무국장,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중앙총회 대의원, 버클리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의 재정모금활동,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재정적 지원을 위한 활동 등을 벌였다.

백 선생은 안창호 선생을 대신해 미국, 하와이, 멕시코 지역 독립운동의 사령탑을 맡아 1919년 3월부터 신한민조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해 책으로 발간했다. 이는 국내·외 최초의 한국경제사 서적으로 궁극적으로 국가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간 북민지방총회 총회장,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백 선생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 재정적 지원을 위해 앞장섰다.

기관지 `독립' 신문의 발기인, 주요 논객으로 활동 등 항일 언론과 한인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헌신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 활동 등 재미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1962년 5월31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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