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비판적 인식 함축'
'역사 비판적 인식 함축'
  • 예천신문
  • 승인 2010.12.2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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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이 추위'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 이야기(22)

절기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은 음력 10월에 들어 있다. 10월 1일을 기해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모두 겨울을 대비하여 모자(帽子)를 쓴다. 정상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은 초피(貂皮)로 하고 당하관은 서피(鼠皮)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 섰다.

이 모자는 다음 해 2월 1일에 벗는데 아무리 겨울에 날이 따뜻하고 또 봄날이 차더라도 마음대로 벗거나 쓰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내년 농사의 풍년을 비는 마음과 추위에 대비하였는데 이것은 내년 농사의 풍년을 비는 마음과 추위에 대비하는 지혜였다.

초겨울 추위는 손돌이 추위부터 시작이다. 손돌(孫乭)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음력 10월 20일은 뱃사공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이날은 해로(海路)를 통해 강화도로 파천(播遷)하는 고려의 왕을 모시던 뱃사공 손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 매년 10월 20일 전후하여 추위를 몰고 오는데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고 한다.

경기도 김포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을 위해 매년 주사손돌공(舟師 孫乭公) 진혼제를 지내고 ‘손돌뱅이 죽은 날, 손사공 죽은 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돌이 죽은 장소를 손돌목이라 하고 손돌풍이 불 때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뱃사람들은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풍랑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고, 집에 있는 사람들은 털옷을 준비한다.

그러면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이 바람과 추위를 몰고 온다는 전설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고려 때 뱃사공이었던 손돌이 몽고병사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종(혹은 공민왕)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곳의 지형적 특성알 알지 못한 왕은 자신을 험지(險地)로 유인한다고 오해하여 손돌을 참수시켰다. 그러나 손돌은 죽으면서도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권하였다.

이것을 따라간 왕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뒤에 왕이 잘못했음을 알고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날이 바로 음력 10월 20일이다. 사실 기상학적으로 고찰할라치면 이 무렵에는 기온이 급강하 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 무렵에 부는 바람이나 바람이 몰고 오는 추위에는 어떤 연유를 간직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민간적 사고로 해석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이 바로 손돌목 전설이다.

강화도에서 생긴 전설이지만 우리 경상도 지방에서도 어릴 때 부모님들로부터 귀담아들은 전설 내용이 귀에 쟁쟁하다.l 어떻든 손돌목은 그 지형적 특성 때문에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으로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넋이 추위와 바람을 몰고 온다고 믿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이런 믿음이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여 손돌목 전설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손돌이라는 뱃사공을 등장시켜 그의 죽음이 억울하고 참혹했음을 부각시켜 손돌목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으며 ‘손돌추위’와 ‘손돌바람’이 불어온다고 하여 이야기에 진실성을 부여한 것이다.

손돌목 전설에서 손돌과 관련된 명칭들의 유래를 통해 민중들은 역사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즉 손돌의 참수를 통해 임금의 근시안적 안목과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왕의 안위를 걱정하는 손돌의 숭고한 모습이, 충성심이 우러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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