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鳶)
연(鳶)
  • 예천신문
  • 승인 2011.02.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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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 이야기(27)
해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바람을 이용하여 하늘 높이 띄우는 연 날리기 놀이가 시작된다. 연(鳶)은 대오리로 뼈대를 만들어 종이나 헝겊조각을 엇맞추어 붙이고 실로 벌잇줄을 메어서 공중에 띄어올리는 놀이기구(장난감)이다. 지연(紙鳶), 풍연(風鳶), 풍쟁(風箏)이라고도 한다.

연놀이는 주로 초겨울에 시작되어 이듬해 추위가 가시기 전까지 행한다. 본격적인 놀이 시기는 중국이 늦은 봄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음력 정월 초부터 대보름 사이이다.

연을 띄우는 장소는 가능한 바람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둑이나 야산(野山)의 언저리 거칠 것이 없는 들판, 강가에 가까운 곳 같이 나무가 없어 연이 걸리지 않는 곳이 좋다. 요즘에는 전봇대와 전깃줄 때문에 마땅한 장소가 드물기도 하다.

연놀이는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다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로 특히 노인으로 하여금 동심(童心)의 세계를 느끼게 하고 연을 직접 만들어서 하늘에 날림으로서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활동유형으로는 눈에 가물가물 보이지 않도록 하는 높이 띄우기, 좌우 급회전, 급강하, 급상승 등 재주 부리기, 연을 서로 교차시켜 연실을 비벼서 끊어 먹는 연싸움 등이 있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큰 성황을 이루지만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대보름이 되면 액(厄)을 보낸다 하여 ‘액(厄)’자 하나, 또는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 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라고 하였다.

한국 연의 유래와 역사를 문헌에서 살펴보면 지금부터 약 1천3백여년 전 신라 진덕여왕 때 `비담'과 `염종'의 반란시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三國史記 列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고려 말엽 최영 장군이 탐라국 평정시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 띄어 절벽 위에 상륙 시켰으며 불덩이를 매단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 보내 불타게 공략하였다는 기록(東國歲時記)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사람들의 구전(口傳) 기록 등이 전해진다.

특히 영조대왕은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여 1725∼7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 보급되어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1954년 민족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날리기를 장려하여 전국 각지의 연 기능보유자들을 수소문하여 연날리기 대회를 처음 개최하게 되었다.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전국연날리기 대회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도 매년 대회장에 나와 관전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연은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놀이로 변하게 되었고 그것이 민속과 결합되어 농경생활과 결합, 섣달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 농한기,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는 시기에 행해지게 되었다.

일제 민족 말살정책과 6·25를 겪는 동안 민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기만 하다. 연의 종류는 수없이 많으나 꼭지연, 반달연, 치마연, 동이연, 초연, 박이연, 발(足)연, 오색연, 어린연, 용미연, 방패연, 가오리연, 접시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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