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 겪는 시기'
'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 겪는 시기'
  • 예천신문
  • 승인 2011.06.03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릿고개'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 이야기(34)
얼마 전 TV뉴스 시간에 넓은 들판에 파랗게 물든 청보리를 방영하면서 다 익은 보리를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줄기째 채취하여 가축사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하여 배고프던 시절 보리가 여물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춘궁기(春窮期)를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릿고개란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음력 4∼5월쯤을 이르던 말이다.

요즈음에야 쌀이 남아돌아 쌀 재배 억제 정책으로 딴 작물을 심도록 하고 있으니 나이 많은 분들로서는 좋은 세월 만났다고 지난 날 어렵던 시절 회상(回想)할 뿐이다.

옛 대부분의 농민들은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 빚, 이자, 세금 등 여러 종류의 비용을 뗀 다음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 때는 대개 풀뿌리나 나무껍질(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乞食)과 빚으로 연명했으며,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하늘을 의지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가뭄, 홍수, 메뚜기에 의한 병충 피해 등으로 굶주림이 심했고, 특히 봄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남은 식량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근래에 와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농민들의 소득도 늘어나고 다양한 식품이 양산되어 쏟아져 나옴에 따라서 보릿개개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 때와 8·15 광복 뒤부터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식량은 떨어져 먹을 것이 없으니 허기진 배를 쑥죽으로 떼우고 아직 여물지 않아 이삭의 알갱이가 누르면 흰물이 튀어나올 정도만 되면 잘라다가 가마솥에 찐다.

열에 의해 곡식이 조금이라도 더 익게 되고 찐 보리이삭을 말려 소득은 적으나 먹을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설화(說話) 같은 이야기이지만 60대 이상 농촌출신은 모두 경험하였을 것이다.

보리는 벼과의 이년초 식물로 서아시아 원산의 식용작물이다.
일명 대맥(大麥)이라고 하고 까락이 길고 찧어도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 겉보리와 까라기가 짧고 껍질과 알이 딱 붙지 아니하여 쉽게 벗겨지는 쌀보리, 일명 나맥(裸麥)으로 나눈다.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아니한다, 하는 속담처럼 여북해서 처가살이를 하겠느냐는 말도 있다.
거친 보리 싸라기나 보리의 기울로 반죽하여 찐 보리개떡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도정(搗精) 시설이 미흡하던 때라 겉보리를 보리쌀로 만들량이면 디딜방아 호박 안에 물을 뿌려가면서 힘들게 쓸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야 하고 짧은 밤이지만 늦게까지 우는 아기조차 등에 업고 방아질 하던 옛 아낙들의 힘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경상도 보리문둥이라 할 정도로 많은 보리를 생산하였으나 이젠 다이어트 식품으로나 이용될 따름이다. 보리누름, 보리타작, 보릿짚모자, 보리막걸리, 보리깜부기, 보리고추장, 보리숭늉 모두 정겨운 말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