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많았을 때는 면부에도 개설'
'인구 많았을 때는 면부에도 개설'
  • 예천신문
  • 승인 2011.12.1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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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 ①'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세시풍속 이야기(44)

매월 2일, 7일은 예천장날이다. 대부분의 시·군청 소재지의 장날은 2, 7일로 되어 있다.

예컨대 문경, 상주, 안동, 의성 장날이 그러하다. 5일장은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단어이다. 여기에서 5일장이란 5일마다 한 번씩 시장을 여는 재래장터로 농민, 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한 사람이 일정한 날짜와 장소에서 서로 물품을 교환하는 정기시장을 말한다.

농촌인구가 많았던 시절엔 면부에까지 5일장이 개설되었다. 지금이야 교통여건이 좋아지고 상설시장, 대형할인마트의 등장으로 5일장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 역사는 오래 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미 장(場)의 기록이 있어 신라는 경덕왕 이후 그리고 백제 지방에서 유행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를 보면 행상(行商)을 나간 남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밤길을 염려한 대목이 나온다.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근심을 부른 가요라는 점에서 남자들의 장기행상(長期行商)을 엿볼 수 있다. 장터는 집약적 농업기술이 앞장 서 있던 전라도 지방에 기근(飢饉)이 심하게 들자 조선조 신숙주의 주장으로 5일장이 최초로 서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농촌사회의 농산물 교역이 성장하고 물화(物貨) 유통이 활발하게 되어 꾸준히 장터가 유지 되었으나 주로 일부 지방 수령(守令)들의 흉년 타개와 굶주린 백성(飢民)에 대한 구휼(救恤)의 한 방법으로 그 기능이 인정되어 명맥만 유지 되었다.

15세기 말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유지되어 오던 장시는 타도로 확산되면서 충청, 경상도에 그 후 조선 8도에 장터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3백27개 군과 1천61개 현에 장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5일마다 열리는 5일형 장시가 9백여개 소, 10일 형이 3백여개 소가 있었다.

5일장은 월 6회 5일마다 열리는 5일형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5일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동양철학에서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만상(萬象)을 변화시키는 다섯가지 원소인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5행(五行)에 따라 정하였다고도 한다.

재래시장인 장날은 짙은 향토색(鄕土色)을 물씬 풍기며 왁자지껄 떠들며 서민들의 삶의 체취(体臭)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장날에는 수십개의 노점상들이 꽉 차 장관을 이루고 우시장 한편에선 잡동사니 가축시장이 열려 인근 주민들이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이나 한 두 마리의 개나 강아지, 토끼, 염소 등을 내놓고 파는 모습들은 참 정겨웠다.

곡물전에는 산간마을에서 가져나온 좁쌀이나 보리, 밀, 수수, 메밀, 깨, 누룩, 콩, 팥 등을 겨우 한되박씩 가져 나온 촌노들의 만남의 장이기도 하고 이웃과 집안대소사의 안부를 주고 받는 곳이기도 하다.

채소전, 마늘전, 어물전, 잡화전, 자리전, 강포(江布)전 등에선 물건을 사고 파는 노련한 흥정솜씨가 볼만 하다.

넓은 장마당을 이곳저곳 구경을 하다 출출하면 도토리묵 한 쟁반, 선짓국이나 소머리국밥, 보리밥, 파전, 손칼국수, 잔치국수에 막걸리나 소주 한 잔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우리 음식이 다양하였다. 요즘에야 빵, 어묵, 피자, 햄버거, 라면 등 신세대 음식이 판을 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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