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시대의 유물'
'봉건시대의 유물'
  • 예천신문
  • 승인 2012.01.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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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①'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이야기(46)

‘귀 먹어서 3년이요 눈 어두워 3년이요 말 못해서 3년이요 석 삼년을 살고나니 배꽃같던 요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내 머리 비사리춤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내 손길 오리 발이 다 되었네. 열새무명 반물치마 눈물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받기 다 젖었네.’

이 민요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민중의 노래로 시집살이의 서글픔, 시집살이의 한과 모습을 묘사(描寫)한 시집살이 노래의 일부이다. 잘 아다시피 시집(媤家)은 남편의 집이요 시부모가 있는 집이다. 시댁(媤宅)이라고도 한다.

시집살이는 여자가 시집 가서 살림살이를 하는 결혼생활이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시집살이가 어려움과 눈물과 한숨으로 부당한 속박을 참고 견디는 규방생활(閨房生活)로 된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삼종지법(三從之法), 효도 지상주의와 정절(貞節) 숭상, 조혼(早婚) 풍습과 빈곤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시집 가서 시집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오늘 날 여권(女權)이 신장되고 점차 핵가족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겐 실감조차 나지 않는 퇴색(退色)한 말이지만, 이 시집살이 때문에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많이도 울고 한숨 짓고 쫓겨나며 심할 때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기도 하였다.

시집살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봉건시대의 유물이다. 따라서 요즈음에도 ‘시집살이’ 하면 고되고 어렵고 구속이 심하고 지긋지긋하도록 부자유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곳간의 열쇠를 맡기지 않음은 물론이요, 고추장 퍼올 숟가락에 묻은 장을 핥아먹는다고 그것마저 며느리에게 맡기지 않았다니 그 고통이야 어떠하였겠는가?

지금도 일이 힘든 데다가 윗사람의 잔소리가 심하면 ‘시집살이가 심한 직장’이 되고 늘그막에 몸이 고된 처지가 되면 ‘늙어서 된 시집살이 만났다’고도 한다.

또 자녀들이 까다롭게 굴면 젊은 엄마는 ‘애들이 시집살이 시킨다’고 푸념한다.

이와 같은 여성 고생의 얼굴 같은 ‘시집살이’의 배경은 무엇일까? 앞에서도 약간의 언급이 있었지만 시집살이는 봉건사회의 부산물(副産物)로서 철저한 남성 우위와 효(孝)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윤리 그리고 가난과 조혼에서 오는 사회적 병폐속에서 태어났다.

특히 조선 5백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이 시집살이의 배경이다.

여성사(女性史)에서 볼 때 조선시대야 말로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최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홀대(忽待)받지는 않았다.

원시종교사회의 사제자(司祭者)라든가 여성 무속인의 위치, 모권(母權) 사회의 일을 그만두고라도 신라시대 여왕이 셋이나 나왔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때 만큼은 못해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조선 같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면 ‘남녀이합 무상(男女離合無常)’이라는 말과 같이 연애가 자유로웠고 왕실에서조차 여성의 재혼이 가능할 정도로 남녀 인권에 어떠한 제도적 차별 대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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