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제도적으로 묶여'
'조선시대에 제도적으로 묶여'
  • 예천신문
  • 승인 2012.02.1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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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②'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 세시풍속이야기(47)

참고 살기 억울하고 허기진 배 쥐어 틀며 힘든 일만 겪게 되는 여성들의 시집살이는 고려 말부터 들어오게 된 주자학(朱子學) 원리에 따라 조선시대엔 완전히 제도적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 근본은 바로 남존여비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이다.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상 위에 누이고 구슬을 주어 놀게 하고 딸을 낳으면 상 아래 누여서 실패를 가지고 놀게 한다”고 하였듯이 다 같은 혈육이건만 남녀는 태어남과 동시에 귀천(貴賤)으로 갈라져서 차별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오늘 날 “아들 많은 사람은 리어카 타고 딸 많은 사람은 비행기 탄다”는 말과는 대조적이었다. 가정 내에서도 “남편은 곧 아내의 하늘(夫乃婦天)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지고 남편을 소천(所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손님같이 공손히 받드는 것이 아내의 미덕으로 여겼다.

자기에게 의견이 있어도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설사 남편이 “소금 더미를 물로 끌라”고 하여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자는 반드시 남편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 여필종부(女必從夫)는 유교 원리에 따른 속담 어록도 많다. “여자 음성이 담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북어와 여자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 난다”는 둥 여자는 유순(柔順)하고 복종(服從)하는 것만을 근본으로 하고 출가 전에는 부모님 따르고(在家從父), 시집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出家從夫),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夫死從子)는 삼종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여자는 일생 동안 중문 안에 갇혀서 신분이 높을수록 바깥세상을 모른 채 조상 제사 받들고(奉祭祀), 시부모 남편 섬기고(事舅姑事夫), 시가 형제 및 동서들과 우애 있게 지내고(善姨恕), 노복(奴僕) 잘 다스리고, 손님 접대 하는(接賓客) 일을 본분으로 여겼다.

노비를 거느리는 계층의 여인이라면 육체적 노동은 면하였을지라도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에 못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집살이는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고 효를 백행지본(百行之本)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에 살아계신 부모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 하여 저녁에 잠자리 보살펴주고 아침에는 이를 돌아보는 조석봉양(朝夕奉養)으로써 실천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었다.

그리고 봉건시대의 결혼이란 오늘날과 같은 1 대 1의 결합이 아니라 한 가문이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당초 아내를 맞이할 때 본인의 의사가 무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쫓을 때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다는 이치이다.

그러기에 “계집은 다시 얻으면 그만이지만 부모는 한 번 가시면 모실 수 없다”는 봉건윤리에서 나온 부부관도 시집살이의 한 부분이었다. 속담에 “지나친 효자는 아내가 외롭다”라고 하였듯이 며느리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의 존재는 시집살이에 별로 도움을 주는 존재가 못 되었다.

“시집살이 말도 마라. 야야 야야 말도 마라. 시집살이 말도 많고 두렵고 고되건만, 여자에게 중대하기 시집 밖에 또 있는가. 보고도 못 본 듯이 듣고도 못 들은 듯, 살얼음 밟는 듯이 태산을 오르듯이, 조심조심 참고참아 순종코 받들지라. 여자로 태어나서 제 길을 버릴손가.”

이 가사와 같이 봉건적 가족 관계, 서민 여성의 고통과 좌절, 허무와 애환 속에서도 시집살이의 한(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우리 조상들의 여인네들은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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