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와 추로지향(鄒魯之鄕)
다문화 사회와 추로지향(鄒魯之鄕)
  • 예천신문
  • 승인 2012.05.1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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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 김 시 우 ㆍ보문면 출생 ㆍ평택대 대우교수
4·11총선에서 필리핀계의`이자스민' 후보가 비례대표자로 당선됐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도 서울시 공무원으로 꿋꿋하게 일하며 영화 ‘완득이’ 엄마 역을 맡기도 했다. 지금도 결혼이민자를 지원하는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니 그가 사회적 소수자인 이민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인터넷 공간에 그의 인격을 훼손하고 고깝게 보는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한국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이고 연간 2만 5천명이 넘는 외국인 이민자와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노동이나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나 지상으로만 만나는 제한된 정보로도 그들에 대한 임금체불, 산업재해, 불법체류에 대한 학대 등 심각한 인권유린은 물론 최소한의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도 한 때 ‘외국인 근로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제 우리는 흔히 자랑하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단일민족으로서 순수혈통에 관한 놀라운 집착에서 벗어나야한다.

이러한 집착이 역사의 큰 흐름인 다문화사회에 배타적 인식과 편견을 심어주는 역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혈통을 자랑하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핏속에는 자그만치 30여 종의 피가 섞여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르다고 여기는 이들과 조화와 공존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이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순수한 우리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불교가 들어올 때 우리의 토속신앙과 조화를 이루어 구복신앙과 호국불교란 한국불교의 독창성을 이루었고 고려자기, 대장경, 금속활자, 심지어 한글 창제까지도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생명력은 조화와 공존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고려 이래 외국인에 대한 정책은 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이른 바 내자불거(來者不拒)였다. 불사이군의 고려 충신 화산(花山)이씨 이맹운·정선 이씨 이양흔은 모두 귀화한 베트남계이고 충주매씨·원주변씨·신안주씨·남양 제갈씨는 중국계, 연안인씨는 몽골계, 덕수장씨는 위구르계 모두 고려 때 귀화성씨이다.

우록김씨는 일본계다. 이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박연으로 알려진 웰트브레는 이목구비가 완전히 다른 화란인으로 인조 때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1여를 두었다. 예를 들자면 지면이 모자란다.
최근 유현우라는 방글라데시인은 한국 부인의 성을 따르고 자기가 살고 있는 시화호수를 본관으로 삼아 ‘시화유씨’를 창설했다.

독일인 이참은 한국에 귀화하여 관광공사 사장까지 하고 있지만 귀화인이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 자녀에게까지 이방인 취급을 하는 풍토 때문이라고 한다.

예천에도 다문화 가정이 3백10여 가구라고 한다. 예천을 충효의 고장, 추로지향(공자맹자의 고향을 말하며,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추로지향’이라고 했다)이라 자랑하지만 이 또한 공맹의 영향이 아닌가.

조화와 공존의 따스함 속에 넉넉한 예천향민의 인심과 행정력의 철저한 배려 속에 다문화가정이 뿌리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추로지향의 참모습일 것이다.

공맹사상의 본질은 사해동포의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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