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채도 시절음식의 하나'
'탕평채도 시절음식의 하나'
  • 예천신문
  • 승인 2012.06.0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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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세시풍속'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세시풍속 이야기(52)

봄을 알리는 명절인 삼월 삼짇날은 음력 3월의 대표적 세시풍속이다. 장(醬) 담그기와 화전(花煎) 놀이도 빼놓을 수 없는 농촌의 일거리다.

농업을 주업으로 삼던 조상들의 풍습과 할일들은 주로 농작물 파종이다.

3월의 농가월령가에 보면 `물꼬를 깊이 치고 두렁 밟아 물을 막고 한켠에 모판하고 논흙을 풀어주며 날마다 두 세 번씩 부지런히 살펴보소. 약한 싹 세워낼제 어린아이 보호하듯, 냇가 밭엔 좁쌀이요 산밭엔 콩이로다 들깨모 일찍 붓고 삼(麻) 농사도 하오리다. 들농사 하는 틈에 채마전(菜麻田)도 가꾸세나.

울밑에 호박이요 처마가에 박심으로 담근처에 동과심어 넝쿨받침 올려보세. 무 배추 아욱 상추 고추가지 파 마늘을 색색이 분별하여 빈땅없이 심어놓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가사 안에 3월에 해야 할 농사의 대부분과 즐겨 먹을 밥 반찬과 나물이 다 나와 있다. 요즘에야 도시인들이 농사 체험을 위해 조그만 땅 뙈기를 분양 받아 여가 선용으로 사용하지만 조상들은 주업(主業)이었다.

우리 예천의 별미(別味)로 알려진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의 당평채(蕩平菜)도 3월의 시절음식의 하나이다.

탕평채는 원래 한국의 궁중요리이다. 채 썬 청포(淸泡)묵, 쇠고기, 녹두싹, 미나리, 물쑥 등을 넓은 그릇에 담고 간장, 참기름, 식초로 고루 버무린 후 황백지단, 김, 고추를 가늘게 채 썰어 고명으로 얹어낸 묵무침이다.

탕평채는 대개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먹으나 술 안주로 사철용 쓰인다.

탕평채의 역사와 유래를 `동국세시기'에 보면 그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 제21대 왕인 영조(英祖)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사색 당파에다 시파, 벽파 등으로 붕당(朋黨) 간 대립이 치열한 시기였다.

영조는 각 붕당 사이의 첨예한 대립과 정쟁(政爭)을 해소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평등하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탕평책의 경륜을 펼치는 자리에서 등장한 음식이 탕평채이다. 탕평채에 들어가는 재료의 색(色)은 각 붕당을 상징했는데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西人), 쇠고기의 붉은색은 남인(南人),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東人), 김의 검은색은 북인(北人)을 각각 상징했다.

각기 다른 색깔과 향의 재료들이 서로 섞여 조화로운 맛을 이뤄내는 탕평채는 탕평책의 상징성을 드러낸다.

무심코 먹는 음식이지만 역사와 유래를 생각하면서 먹는다면 더욱 맛이 있을 것이다.

3월의 음식으로 술과 떡을 빼놓을 수 없다. 과하주(過夏酒) 소국주(少麴酒) 두견주(杜鵑酒) 도화주(桃花酒) 송순주(松筍酒) 등이 모두 봄에 빚은 훌륭한 술들이다.

떡집에서는 멥쌀로 희고 작은 떡을 만드는데 그 속에 콩으로 소를 넣고 머리쪽을 오무린다. 모양이 방울같이 생긴 떡에 오색물감을 들여 다섯대를 이으면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의 떡이 된다.

옛날 남산 아래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부에서는 좋은 떡을 많이 만든다하여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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