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물길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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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신문
  • 승인 2013.08.2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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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 마을에서 하룻밤을// 김영진 시인

물길의 미학
-무섬 마을에서 하룻밤을

시인 김영진(보문면 출생)

1. 강이 휘돌아가는 물 안의 섬

어디서 오셨니껴? 서울요! 먼데서 오셨심더.
여기 좀 앉으시면 저 내성천이 고만 이 가슴으로 흐르능기라요.
할매는 골목 안 돌 위에 앉으신다.
“무섬 지킴이 박종우 선생은 잘 있나요?”
“저 강 건너 밭에 일하러 갔니더.”
“김한기 씨는요?”
“거기는 서울 가 사니더.”
무섬 사람 만나면 무섬이 좋아서인지 꼭 물어볼 안부다.
“할매는 잘 살고 계시네요?”
양반댁 헛기침을 내성천에 둥실둥실 떠내려 보낸다.
“시방 내사 영감도 가고 자식들 멀리 떠나고 그냥그냥 혼자 사니더.”
태극선은 오른손에, 왼손은 치마 끝을 잡고 ‘누가 오나’ 하고 집 앞에 나와 있다. 마침 박종우 어른이 옥수수를 꺾어 가지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셋이서 무섬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사람 살기 좋은 흡족한 동네다. 큰 기와집이 가득한 마을로 박 씨와 김 씨가 사는 반촌이다. 강물도 누워서 조심조심 흐르고 물길도 천천히 돌아서 간다. 모래사장을 지켜 방죽을 쌓고 비가 많이 내려도 마을은 아무 탈 없이 지낸다.
“섬도 아닌 것이 무섬이 된 게 좀 이상하네요?”
“중국 섬계와 지형이 흡사하다 하여 생긴 이름 아닙니껴.”
“물섬이 ㄹ받침 버리고 그냥 무섬이 된 것이지요.”
내성천이 휘돌아가는 물 안의 섬이다. 아기자기한 민속촌 무섬 마을은 내성천이 굽이치는 길목에 살고 있다.

무섬의 강물이 사철 옹골차게 흐르는 것은 태백산, 봉화 내성천과 소백산 영주에서 오는 서천이 무섬 뒤통수에서 합류되어 하나로 흐르다가 그렇게 물마디가 굵어진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풍수지리에 연화부수(蓮花浮水)와 매화낙지(梅花落地)라는 천하 명당의 호평을 받은 것이 바로 무섬 땅이라는 것이다.

2. 마을의 역사

1666년 반남 박 씨 수 어른이 터를 닦은 뒤 종손녀 사위 선성 김 씨(예안)와 함께 살아온 성씨 집성촌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박재연은 승정원, 사헌부, 병조참의를 두루 거쳤다. 오헌은 40여 년 공직에 있다가 벼슬을 접고 물러나 무섬에서 정신적인 큰 기둥이 되었다.

마을 어귀에 이르러 청퇴정(淸退亭)에 오른다. 오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시방도 들리는 듯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손 모으면 하늘은 어찌 저리도 맑게 웃는지. 선비의 고매한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김 씨 집안에는 대원군의 친구로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는 김낙풍이 있다. 해우당(경북민속자료 92호) 기와지붕이 그 위세를 잘 나타내고 있다.
“김 씨 집안 능참봉을 지낸 김휘윤 후손 석포 김위진은 천석꾼이었지요.”
“법전댁은요?”
“그 집도 한때는 논밭이 150마지기로 넉넉했지요. 번성할 때는 동민수가 500명이 넘었어요. 지금은 38동이 전통 가옥, 16동은 백년이 넘은 사대부 가옥이지요.”
대표적으로 해우당이 있고 만죽재(경북민속자료 93호), 청퇴정이 있다.
“조지훈 시인이 20세에 무섬 김난희 규수에게 장가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뼈대 있는 집안끼리 혼인을 한 것이지요. 조지훈 시인 처갓집이 바로 만운고택(경북민속자료 118호)이고요.”

방죽 끝자락에 조지훈 시인이 처가 동네를 그린 「별리」가 있다. “십리나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로 시작된다. 부인 김난희 씨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박 씨, 김 씨 두 집안에 인물이 많이 났지요.”

무섬 방죽을 쌓고 나라를 지키며 살았던 선조의 손끝에 피가 맺히던 고향 사랑이 남긴 무섬이다.
이 마을에는 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도 많다. 애향심 하나로 세월을 이기고 살아온 어른들의 마을이다. 이래서 역사와 문화가 깃든 땅 무섬을 찾아가는가 보다. 우리 겨레의 본고장을 만나는 기쁨이 가득하다.

3. 외나무다리

가던 길이 끊어지고 물길만 바라보던 자리에 서면, 전설의 먼 강물 위로 가느다란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무섬 가는 길은 강물 앞에서 끊어지고 외나무다리로 이어진다.
“다리 길이는 150미터 정도, 넓이는 20~30센티미터지요. 학교에 갈 때도, 일하러 갈 때도, 장보러 갈 때도 이 다리를 350년 건너다녔지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조심 다녔어요.”

잃어버린 삶의 전설을 안고 들어서는 외나무다리다. 다리는 물 위에서 외줄기로 흔들린다. 다리가 물을 건너는 것인지, 물이 다리 밑을 감도는 것인지. 이렇게 길은 또 이어진다.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고 다시 이어 놓으면, 어떤 때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건너가지요. 거기에 눈발 날리고 찬바람 휘몰아칠 때도 있지요. 안타까운 바람에 휘몰려 영영 돌아오지 않아요. 외씨버선코 물에 젖을까 허리 굽혀 건너던 새댁이, 할머니가 되어 상여를 타고 가던 것도 이 외나무다리에서 비롯되었지요.”
조지훈 시인이 무섬 처갓집 다닐 때 이야기다. 영양 땅 선비가 겸허히 허리 굽히고 다니던 곳도 이 외나무다리였다.
“한때는 외나무다리에 소작농 행렬이 줄을 이었지요. 저 모래사장에서 연날리기도 장관이었어요. 산 너머에서 되돌아오는 바람결 따라 고향 찾는 고마운 발길들이 줄을 잇곤 했지요.”

4. 모래사장

무섬 모래사장은 그림처럼 무척 아름답고 넓다. 많은 사람들이 뛰놀아도 좋은 곳이다. 한없이 걸어 보고 싶다. 모래가 폭신폭신하고 따뜻해서 맨발로 걸으면 더욱 좋다.
강은 모래가 물을 먹고, 물은 모래를 담아 맞물려 산다. 모래는 물이 좋아 강을 떠나지 못한다. 강기슭에 깃든 새는 숨어 있는 강물이 좋아 더욱 못 떠난다. 마침 백로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강 건너 물가에 내려앉는다.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접 발로 강을 건너고 싶다. 맨발로 모래를 밟으니 발바닥이 뜨끈뜨끈하다. 밟을수록 살갑다. 물에 들어서니 모래가 굴러가는 움직임이 발바닥에 느껴진다.
물은 모래 위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모래 밑으로도 흐른다. 강 중간에 들어서니 강물은 정강이를 적시며 깊어진다. 강 밑에는 모래와 물살이 만나고 있다.

물이 깊어 생각보다 물살이 세차다. 출렁거리는 물길은 모래사장을 희롱하며 재빠르게 회오리친다. 물속이 들여다보이는 바닥에는 모래무지가 모래를 치고 지나간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끼어들면서 스쳐간다. 서늘하다.

강을 건너가 무섬 마을을 되돌아본다. 무섬 고유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을은 조용하고 편안하다.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무섬 사람들은 모래사장을 앞마당으로 350년을 살아왔다. 정월 대보름이면 달집 태우는 놀이를 했다. 여름날 밤에는 씨름하며 뒹굴던 모래사장. 눈이 내리면 하얀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울잠을 잔다.
여름 홍수 때는 강둑에 나가 물구경을 했다. 홍수가 나면 물길이 바뀌어 모래사장은 물바다가 된다. 나무가 뿌리째 떠내려온다. 가구들이 둥둥 떠내려온다. 가축도 둥둥 뜬다.

큰 강물의 발작으로 강촌은 홍역을 치른다. 강의 대청소는 이렇게 치러진다. 물이 다 빠져나가면 새로운 모래가 쌓인다. 물이 빠진 자리에는 물결무늬가 그려진다. 그리고 물은 다시 맑아지고 얕아진다.

무섬 이야기는 끝없이 정겹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사는 마을이라 자주 들러 자고 가기도 했던 추억이 새롭다. 지금도 마음이 푸근한 것은 옛 벗의 집이 내 집인 것 같던 전통 마을의 정취 탓일까?
무섬 마을 사람들은 그 정갈한 사고방식만큼이나 맑고 깨끗하다. 내성천 물빛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옛말에 인걸은 간 곳 없고 산천은 의구하다 했던가? 그래도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은 언제나 넉넉한 가슴을 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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