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로 본 예천청단놀음의 역사
언론보도로 본 예천청단놀음의 역사
  • 예천신문
  • 승인 2014.03.2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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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광장// 강원희 예천통명농요보존회장

▲강원희(예천통명농요보존회장)
막연하게나마 전라도 부호 이야기로 시작한 전설과 붉고 푸른 옷에 탈을 쓰고 정월에 동제 후 탈놀음을 했던 청단놀음의 귀중한 자료를 찾았다.

작년11월 29일 예천청소년수련관에서 ‘예천청단놀음 재조명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靑丹(청단) 용어와 역사성을 재조명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일부에서는 ‘왜 하필 전라도사람이냐’, ‘가뜩이나 영·호남 갈등인데’, ‘광대패 이야기인데 그 곳에 많은 돈을 지출 하느냐?’하고 볼멘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이젠 1938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7면에 藝術的(예술적) 薰香(훈향) 가득한 醴泉(예천)의 `靑丹(청단)노리'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예천군청 근무 이재완 학예연구사의 제보로 청단놀음의 역사가 인정 되었다고 본다.

그 역사성 만이 아니라 예술성을 1930년대에도 이미 인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접하고는 감회가 새로웠다.

▲1938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예천청단놀음.
1976년부터 조사하고 연구한 청단놀음에 대해 역사성을 이야기하며 철없는 젊은 초등학교 교사(이 당시 필자 나이가 26세)의 말에 놀아난다고 하기도 했었으나, 이제는 역사성을 이야기하면 귀중한 자료가 있어 우리 예천사람들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여타 어느 탈놀이보다 예술성을 일제 강점기에 인정이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이청단(李靑丹)이라는 8세 소년의 효심이야기를 새로이 접하고 보니 ‘충효의 고장 예천’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38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정초에 가지가지 행사와 오락·풍속·정초의 전래(傳來) 등 각 지방의 특색 있는 놀이가 기사화되었다.

이 지면에 기사화 된 것 중 강령탈춤, 봉산탈춤, 동래야외가면극, 북청사자무, 하동오광대등은 국가에서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 국가차원에서 보존하고 전승을 하고 있으나 醴泉(예천)의 `靑丹(청단)노리'는 여타 탈놀이보단 내용이 더 풍부하고 기사내용을 중요시하게 다루었으나 그간 중단되어 아쉬움을 더 해 갈 따름이다.

1981년부터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출연을 위해 당시 최원한 예천문화원장님, 윤종식전문화원장님과 권혁일 부원장님, 김위진, 김윤진, 장원석, 장철해 선생님, 윤기서 님께서는 전국대회 출연해서 상을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문화를 복원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하시고, 단원들을 모으고 각 마당별 내용, 탈과 복장, 춤사위 등을 고증 받고 최대한의 복원에 힘써 세대가 바뀌어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는 여기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과 단원들이 보수나 어떤 혜택 없이 활동하여 온 결과가 아닌가 본다.
혹자는 30년이 넘도록 ‘신이 내렸나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냐?’하기도 하며 칭찬 하기도하고, `바쁘고 힘든 세상에 무슨 일이냐?' 하며 반 핀잔을 하기도 했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후 무형문화재 신청을 위해 노력을 했으나 그때마다 “예천의 어느 역사자료에라도 靑丹(청단)이라는 두 글자만 찾아오면 문화재지정은 될 텐데” 하며 아쉬워 하셨던 문화재위원님의 말씀이 새삼 생각나고, ‘기회는 또 오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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