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담성당 대죽공소' 2017년 7월 경상북도 산업유산 선정
'구담성당 대죽공소' 2017년 7월 경상북도 산업유산 선정
  • 장귀용
  • 승인 2018.02.1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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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쟁직후 건립 문화적 보존가치 높아

지난 2017년 7월 3일, 경상북도는 지보면 대죽리 '대죽공소'를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했다.


대죽공소는 문화적 보존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지역 신자들이 6·25 전쟁 직후의 고난을 달래고, 마을 재건을 위해 의견을 모으는 장소로 쓰인 이력이 선정의 주요 이유다. 지금 현재는 건물을 사용되지 않아 지붕이 일부 훼손되고 건물 내부도 상당히 부식되어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대죽공소 전경.


대죽공소는 1953년 마을의 천주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됐다. 지금은 건립에 관여하거나 내용을 아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작고하고 당시 대죽공소 부지 일부를 희사했던 김경화(세례명: 아오스딩) 씨만 마을에 남아 있다. 김씨는 "대죽공소가 지어지기 전의 천주교 신자들은 마을 주민의 사랑채나 마당을 이용해 기도를 드렸다. 그런 상황에서 신자들의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마을의 열성 천주교 신자였던 최해걸 씨 등이 주도하여 공소가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또 "대죽공소 부지는 당시 풍수지리적으로 음지에 해당하여 사용하지 않는 땅이었는데 종교 건물로는 오히려 음지가 낫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에 짓게 되었다"는 비사를 들려주었다.

△오른쪽이 김경화(세례명 아오스딩) 씨

당초 대죽공소는 1958년 말 건립된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으나 마을 주민들의 전언과 공소 건립 당시의 기록, 1960년대~80년대 예천군지에 따르면 대죽공소는 1953년 당시 예천 본당의 신현옥 시릴로 신부(제5대 본당 신부)가 고(故) 최해걸 씨 등과 의논하여 건립하였으며, 주중에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는 날에는 미사를 집전하고 다른 날에는 신자 예배를 드렸다고 전한다.


신 신부는 1958년 5월 초까지 예천본당의 주임신부를 지냈기 때문에 1958년 말 건립설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대죽리는 1953년 공소 설립 후 한때는 열성 신자가 1백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신심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세례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천주교의 영향이 큰 동네였다.


지금 현재는 1백80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약 20여 명이 정기적으로 성당에 나간다고 한다. 건립 직후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소 건물이 주민들의 의논 장소로 활용되고 6·25 전쟁 직후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치유의 역할도 담당했다.


1990년대 중반, 예천본당이 건물을 증축하고부터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천본당으로 나가게 되어 점차 공소 이용이 줄어들다가 인근의 구담성당이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대죽공소의 신자들도 구담본당으로 편입돼 대죽공소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마을 주민들이 관리하면서 유지하던 공소 건물은 2002년 공소 성립 50년을 기념하여 공소 앞에 대죽공소를 세우는데 공헌한 초창기 신도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운 뒤 완전히 폐쇄됐다.

△2002년 공소 폐지 당시 공소설립에 기여한 신도들의 이름을 세긴 비석


이런 내막을 전해들은 경상북도에서는 주민들의 공간이자 지나온 시대를 잘 보여주는 대죽공소 건물을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 관계자에 따르면 대죽공소 건물의 보수를 위해 도비 1억 원을 책정하여 건물보수 및 향후 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고 한다.


예천군에서도 이런 경북도의 계획에 부응하여 추경에 관련 예산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역사는 기억될 때 가치를 가진다. 대죽공소의 가치도 다시 빛을 볼 날이 멀지 않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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