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의 儒脈에 대한 小考
朝鮮의 儒脈에 대한 小考
  • 예천신문
  • 승인 2018.06.2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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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변정구
▲변 정 구
용문면 출생
전 성균관 부관장

 

儒學(유학)은 본래 공자의 敎學(교학)이다. 儒敎(유교), 儒道(유도), 儒林(유림)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이나 유학의 지향하는 학문의 내용은 修己(수기)治人(치인)이나 수기란 자기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치인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孔子(공자)의 본명은 (). (자는) 仲尼(중니·B.C 551~479)萬世宗師(만세종사)이다.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나라가 1백여개로 분열되었던 춘추시대 말 난세이었다. 난세가 孔夫子(공부자)라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공부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설흔에 홀로 섰으며 (三十而立) 마흔에 더 이상 미혹되지 않았으며(四十而不惑) 쉰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예순에 어떤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았으며(六十而 耳順) 일흔에는 마음이 하는데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이러한 공부자의 고백에서 우리는 위대한 성인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배움에 뜻을 둔 이래 쉼 없는 자기 연마와 자기극복의 과정을 거쳐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공부자의 가장 큰 가르침은 ()이다. 인이란 사람이 사는 세상에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며, 실천하는 행위이다. 공자의 의 사상은 자기의 삶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남을 해하지 아니하고(無求生而害仁) 자기자신을 희생하여아한다.(殺身成仁) 사람이 사람답게 세상을 살면 아무리 험난한 세상일지하도 평화가 온다. 정치는 모든 사람이 바로 갈 수 있도록 그 길은 정비하는 일이다. 그래서 공부자는 그 길을 정비하고자 천하를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다.

 

1. 를 부르짖은 孟子

孟子(맹자)의 본명은 (·BC372~289)이다. 亞聖(아성)으로 불린다. 맹자는 공자 사후 1백여 년이 흐른 뒤에 태어났다. 역사에서는 맹자가 살았던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하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 , , , , , )의 일곱 나라들 간의 오랜 전쟁 끝에 BC221년 마침내 ()이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맹자는 전쟁시대의 한복판에서 맹자는 인과 의를 외치며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모든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覇道(패도) 만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군주들 앞에서 오직 인과 의만이 있을 뿐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인정만이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역설하였다. 맹자는 백성이 첫째이고 통치자는 맨 나중이라 강조했다. 나라의 근간은 백성이며 民本(민본)에 기초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2. 儒學의 새역사를 쓴 朱子

朱子(주자)의 본명을 () 호는 晦庵(회암·1130~1200)는 남송대의 대학자로서 북송 때부터 이어져온 新儒學( 신유학)性理學(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북송시대에 소웅,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北宋(북송) 5자가 등장해 새로운 유학의 전통을 만들었다.

특히 주자는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가 맹자가 죽은 후 사라진 도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친구 여조겸과 함께 이들 4명이 쓴 저작에 정수가 되는 문장을 뽑아 近思錄(근사록)을 편찬하였다. 주자는 주자학의 핵심인 성즉리나 心統性精(심통성정) 역시 장재와 정이의 학덕을 주자는 받아들여 원시유학이라고 불리는 孔孟儒學(공맹유학)의 이론적 결핍을 보강함으로써 도교와 불교이론에 맞서는 새롭고 정밀하고 치밀한 유학 학문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주자가 심혈을 기울려 완성한 새로운 유학의 결정체는 四書(사서)이다. 주자는 공부자의 논어에 관한 集註(집주)를 저술하는 한편 맹자에 대한 집주를 저술해 그동안 잊혀진 맹자를 복권시켰다. 그뒤 禮記’(예기) 편명에 불과했던 大學(대학)中庸(중용)’에 자신만의 독특한 주석을 달아 논어와 맹자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四書集註(사서집주)를 만들었다. 주자가 죽고난 뒤 남송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은 주자의 사서집주를 과거시험의 공식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바야흐로 주자학의 시대가 도래하여 그 후 주자는 7백여년 간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다.

 

3. 한반도에 朱子學을 전한 安珦

안향(1243~1306)은 고려 말의 대학자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주자의 상리학을 들여온 학자이다. 원나라는 南宋(남송)의 주가가 집대성으로 성리학을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있는 시기였다. 안향을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도착한 그는 朱子全書(주자전서)를 보고 충격에 휩싸여 그것을 직접 배끼고 그리고 공자와 주자의 眞像(진상)을 그려가지고 돌아왔다. 안향은 언제나 주자의 畵像(화상)을 벽에 걸어두고 흠모하며 그를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안향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1319년 고려 충숙왕은 興學(흥학)養賢(양현)에 끼친 공을 평가하여 그를 文廟(문묘)從祀(종사)하도록 했다. 1542년 중종37년에 풍기군수 주세봉이 영주 순흥에 안향의 祠宇(사우)를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1550년 풍기군수 퇴계 이황의 요청에 따라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賜額(사액)이 내려졌다. 안향은 주자의 성리학을 한반도에 들여온 선구자에 대한 합당한 예우였다.

 

4. 朝鮮 性理學宗祖 鄭夢周

포은 정몽주(1337~1392)라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지키려다 목숨을 바친 충신이다. 정몽주의 삶을 예의와 충절을 목숨보다 중시한 조선조 성리학의 師表.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은 그를 높여 東方理學(동방이학)始祖(始祖)’라 칭송하였다. 성리학적 사고가 현존하는 한국사회에서 포은 정몽주는 명실공히 한국성리학의 宗祖(종조)라 할 수 있다.

포은은 고려 말과 ·(·) 교체기라고 하는 동아시아의 급박한 상황을 탁월한 국제 감각으로 실용외교 노선을 통한 당대 최고의 국제 외교전문가이었다.

포은은 명나라 사행길은 16년에 걸쳐 6차례 이루어졌으며, 포은은 국내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국외에서는 元明이 교체되는 격랑의 시기를 살다간 한국외교의 세계적인 인물이다. 조선시대 들어서 文廟從祀(문묘종사)道統(도통)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을 때 정몽주는 義理論(의리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文廟(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때가 중종121517년이었다. 조선의 왕조창업에는 최대의 걸림돌이었으나 후세의 영원한 디딤돌로써 정몽주 같은 충신의 표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5. 朱子學集大成李滉

퇴계 이황(1501~1570)()가 움직인다(理動), ()()가 함께 발한다(理氣互發·이기호발)등의 주장으로 유명하다. 퇴계는 남송의 주자의 성리학을 동방의 조선에 한층 심화시키고 발전시킨 철학자로서 높이 평가 받는다. 퇴계에게 주자는 학자로서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교과서를 말들어준 사람이었고 관료로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서 ()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퇴계는 훌륭한 주자학도가 되기 위해서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 대전서를 깊게 그리고 널리 연구하였다. 퇴계는 주자학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자 주자학의 바탕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저술하고 주자학의 계통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宋季元明理學通錄’(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하고 주자학이 지역특성에 맞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서원을 활성화시키고 주자학의 세계가 일상에 뿌리를 내릴수 있도록 향약을 보급하였다.

퇴계가 학자로써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초학자의 경우에도 성리학의 규모와 내요을 쉽게 알수있도록 聲學十圖’(성학십도)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리학의 방대한 내용들 가운데 핵심만을 가려 뽑아서 10개의 그림을 그리고 밑에다 풀이를 덧붙여서 성학십도를 만들어 새로이 임금이 된 선조에게 바쳤다.

퇴계의 철학은 세상을 뜨기 일 년 전에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에 모두 담겨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열 가지의 철학적 잠언의 도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래서 퇴계의 철학은 한마디로 ()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 경의 기본개념은 主一無適(주일무적)이다. 이 주일무적은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동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황은 평생을 이렇게 경 공부를 하면서 학문에 매진했다. 그것을 居敬窮理(거경궁리)라 한다. 퇴계는 공자와 맹자에서 정자와 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을 지키고 이어가는 일에 평생 온힘을 쏟았다.

 

6. 未來儒學者 李珥

율곡 李珥(1536~1584) 조선의 성리학을 대성한 哲人(철인) 賢人(현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 차례도 어려운데 모두 9차례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九度壯元公(구도장원공)이라 불린다.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율곡은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고 개선하려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율곡은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가까이 되어 쇠퇴기를 맞았다고 보았다. 당시 조선이 처한 위기상황을 타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更張(경장)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흠집이 생기고 기울게 마련이듯이 나라도 시대가 지나면 처음에 만든 제도의 결합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을 거라 하였다. 오래된 집을 유지하려면 유능한 기술자를 시켜 기둥을 갈고 수리하여야 하듯이 국가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하며, 바로 이것이 更張(경장)이라 한다.

율곡이 주장하던 更張論(경장론)은 그 생전에 변화를 꺼리는 조정의 분위기속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율곡이 죽은 후 얼마 안되어 임진왜란의 참상을 겪으면서 늦게나마 율곡의 更張論(경장론)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율곡의 更張論(경장론)은 후대에 실학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을 발흥시키는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東湖問答(동호문답), 聖學輯要(성학집요), 擊蒙要訣(격몽요결), 時務六條啓(시무육조계)

 

 

7.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은 김창숙(儒道會 初代會長)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일생은 독립운동과 반독재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창숙은 19193.1운동 이후 곽종석 등 전국의 유림을 규합, 모두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독립청원서를 작성한다. 김창숙은 이 독립청원서를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독립청원서를 우편으로 제출한다. 이 사건으로 국내에 있던 곽종석 등 수맥 명의 유학자들이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다.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김창숙은 이후 이회영(李會榮)등과 함께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258월에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쳤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수백여 명의 유림들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김창숙은 이렇게 유림을 대표해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이후 해방이 되자 김창숙은 가장 먼저 지리멸렬해진 유림들을 규합하는데 전력투구한다. 그리하여 1946년 봄에 난립한 유림단체를 통합하여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하고 초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절락되어 친일파들이 장악한 성균관을 정상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김창숙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명실상부한 현대식 교육을 위해 뜻있는 유림들과 함께 성균환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김창숙은 19488월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머ᅟᅡᆫ 정권에 대항해 반독재반부패 투쟁에 나섰다. 1951년에는 이승망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유교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알수 있다.

 

8. 현대 한문학(漢文學)의 태두(泰斗) 이가원(儒道會 二初代會長)

연민(淵民)이 이가원(李家源, 1917~2000)23세까지 한학만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가원은 뒤늦게 1941년 명륜전문학원을 나왔다.

광복 후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54년 성균관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총장이었던 김창숙과 함께 이승만 정권에 항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파면 당하고 만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에 정년퇴직하고, 이후 단국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가원은 가학(家學)으로 체득한 한학을 해방 후 대학 강단에 새롭게 승화시킨 학자이다.

이가원은 한문학 중에서도 특히 연암 박지원 연구로 이름이 나왔다. 대표 저서인 <연암소설 연구>는 박지원 소설의 사회적 배경과 문학관을 십여 년에 걸쳐 조사하고 분석한 뒤 4년 동안 집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고전들이 그의 손을 거쳐 알기 쉬운 우리말로 풀이되었다. 이가원은 만년에 대작인 <조선문학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평생 죽어서야 그친다.(死而後已)는 증자(曾子)의 말대로 마지막까지 고전과 씨름하며 한문학 연구를 통해 우리 문학사의 지평을 넓혔다.

또한 이가원은 1970년에 5.16군사정부의 포고령에 의해 해체된 유도회를 수습해 성균과유도회총본부를 발족시키고 1974년까지 심산선생의 뒤를 이어 제2대 위원장을 맡아 유도부흥에 힘썼다. 그리고 이가원은 유도(儒道)에 몸을 담그면서 한문학을 통해 조상들이 남긴 한문의 세계를 한글세대에게 계승함으로써 한국문학사의 금맥을 캐낸 일등공신이다.

 

 

前 成均館 副館長 邊 鼎 九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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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식 2018-06-22 20:57:59
유학을 알기쉽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