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을 위한, 용문에 의한, 용문인들의 모임 (2화)
용문을 위한, 용문에 의한, 용문인들의 모임 (2화)
  • 예천신문
  • 승인 2019.07.1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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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향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단체와 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왔다. 내 쪽에서 먼저 하겠다고 자청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주위로부터 등을 떠밀려 얼떨결에 쓴 감투들이 대부분 이었다. 지인들이나 벗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침없고 분명한 나의 업무 추진력과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이끌어가는 리더쉽이 필요하다며 억지로 회장 자리에 끌어다 앉히고는 한다. 그 중에는 정말 시간적 여건이 안되는 데도 거절할 도리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맡은 자리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책임을 맡게 되면 열과 성을 다해야 마음이 편한 타입이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딱히 꺼려지지는 않았다.
 
특히 오래전부터 고향에 무엇으로든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용지회 회장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어떤 활동보다 애정과 열정으로 임할 수 있었다. 용지회 회장직에 남다른 열의를 가지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후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나는 고향 사람들과의 접촉이나 만남을 가능한 피해 다녔다. 남들에게 내 부끄러움 모습을 절대 내보이고 싶지 않는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궁색하고 초라한 처지를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가 잡히면 고향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목표 때문에 정말 열심히 살았다.
 
직장인 명지대학교의 내 입지가 조금씩 안정되어 가던 30대 중반 무렵부터 동향 모임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러도 얼굴을 비치지 않던 내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고향 사람들은 돌아온 친척아이를 맞이하듯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철저한 나의 지난 외면에 마음이 상했을 법도 한데 따뜻하게 품어주는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라도 적극적으로 애향 활동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활동이 ‘용지회’ 였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겠으나 간단히 ‘용지회’에 대해 다시 정리해 보려 한다. 서울에서 용문출신의 유지 15명이 자양당 김철훈 서예가를 중심으로 1973년 1월15일 종로 광교다방에서 ‘15구락부’를 발족하였다. 창립멤버로는 ‘김정후, 박인재, 박노수, 박용희, 박영재, 김철훈, 박희택, 김종률, 김목휘, 임상규, 변우량, 고재환, 심성보, 박노삼, 장찬주’ 였으나 이미 반수는 고인이 되었다. 이후 용지회로 명칭을 바꾼 이 모임은 아직까지도 고향의 발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주요 활동은 전국의 명승지관광이나 선조들의 유적지 답사 등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 탐방이 주목적인 순수 친목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 그동안 모래알처럼 각자 따로 흩어져 있던 재경 용문인들이 한데 모일 수 있었다. 대개의 향우회처럼 용지회도 회원간의 연령과 세대 간의 격차가 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 만나면 정말 한 지붕 수 십 명의 가족들처럼 각별한 정을 쌓아갔다. 용지회가 다른 동호회 모임들과 가장 차별화된 점 하나는 기존의 회원이 사망했을 경우 그 자녀가 회원자격을 승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를 이어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같은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정신적 유대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대표는 연장자 순으로 1년간씩 맡게 하였고 간사는 연소자를 윤번으로 수임토록 하였다. 이후 용지회는 정기 모임을 통해 더 체계적이고 조직화되어 갔다.
▲ 1988년 용지회는 남원 광한루에서 연수회를 개최했다
▲ 1988년 용지회는 남원 광한루에서 연수회를 개최했다

특히 초등학교 선배회원이자 예천지역 전 국회의원이었던 변우량 교수의 주도로 용문면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과거의 향우회를 재창립 하자는 의견이 발의되었다. 회칙의 초안을 맡은 나는 다른 회원들의 의견을 적극 참조해 새로운 협회를 운영해 갈 구체적인 틀을 완성해 나갔다. 곧 향우회 회장으로 김목휘 씨를 선출한 후 우이동 아람장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첫 발기총회를 가졌다. 이를 시작으로 ‘재경용문면민회’의 활동이 본격화 되었고 용지회 에서는 나를 2대와 3대 재경용문면민회 회장으로 연이어 추대했다. 향우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믿음에 힘입어 연 4년이라는 긴시간 동안 고향 용문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중에서도 재경용문면민회의 활성화와 조직 강화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용문면 각 초등학교 졸업기별 대표와 동별 대표를 선출해 그들에게 면민회 모임의 리더 역할을 맡겼다. 또 매달 각 기별 대표들과 운영위원회를 열어 다양한 안건들을 논의했다. 이렇게 조직을 세분화 해 각 리더를 중심으로 모임을 이끌자 용문 전체의 화합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회원들도 더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장직을 맡고 있을 당시 재경용문면민회 활동으로 가장 주력했던 분야는 ‘예와 효의 고향’이라는 명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절과 정신 개조에 관한 교육을 위한 연수회’를 무주구천동과 주왕산 관광호텔에서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고향 찾아보는 날’ 행사를 마련했다. 1991년 5월18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고향 찾아보는 날’ 행사는 그 동안 찾 아 보지 못한 고향 용문의 명소를 돌아보고 당시에 수입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과 급속한 이농현상으로 점점 부족해져 가는 농촌의 노동력부족 때문에 걱정이라는 향민들의 고충도 들었다.
▲ 재경 용문면민회의 고향 찾아 보는 날(1993.)
▲ 재경 용문면민회의 고향 찾아 보는 날(1993.)

이런 농촌의 현실을 연일 사회문제로 이슈화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도했던 ‘고향 찾아보는 날’ 행사가 주요 언론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어 열띤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 생각해보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어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던 이들과 재회한 후의 광경이 얼마나 감동적일지. 실제로 향민과 출향인 들이 한자리에서 만날 때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각별했던 친구들이 뻔히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미처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사회자의 소개로 상대를 알아보고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반기던 모습은 정말 이산가족의 재회 광경만큼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가족과 일 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사내들은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모처럼 어린 시절 개구쟁이 시절로 돌아가 밤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놀았다. 고향 방문객들을 위해 홍갑주 당시 용문면장은 면사무실에 산채비빔밥과 막걸리를 준비해 풍성한 환영회를 준비해 주었다. 재경면민회에서는 또 효와 예의 고장답게 최고의 효행상도 선정 시상했다. 용문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평소 부모에 대한 효도와 웃어른을 공경하는 생활태도를 보고 타의모범이 되는 향민을 선발해 상패와 상금을 포상했다.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이 일상적인 시골에서 특별히 효행상을 제정한 것은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효’의 미덕을 고향 용문만은 잘 지켜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재경용문면민회에서는 서울에서 성금을 모은 2천만 원을 용문면문화체육기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용문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예천기념 배지와 참기름, 볼펜 등 소박하고도 정이 담긴 답례품을 준비해 주었다. 고향의 맛이 그리웠던 회원들은 행사가 끝난 후 각자 자비로 용문에서 재배한 고춧가루와 씨마늘 등을 구입해 귀경버스에 가뜩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귀경길 차안은 다시 고향을 등지는 서운함과 꼭 다시 돌아 올 날을 기약하는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날의 행사는 KBS한국방송,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 우리나라 여러 매스컴을 통해 주요 기사로 다루어졌다. 그러자 전국에서 예천 씨마늘을 구입하겠다는 문의가 쏟아졌고 직접 마늘 구입을 위해 용문으로 찾아 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고향 방문 행사를 기획하고 이끈 임원들 모두는 이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큰 도움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고향 사람들 살림에 작은 보탬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이룬 프로젝트였음에도 회원들은 회장인 나의 탁월한 추진력과 집행력 덕분에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며 모든 공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거짓 없는 그 위로와 격려에 행사 준비과정에서 겪은 마음고생과 피로가 한순간 다 만회되는 기분이었다.
 
회장 재임시절 열심히 준비하고 진행한 몇몇 행사는 아직 까지도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추억이자 특별한 의미를 남긴 행사로 회자되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재경용문면민회의 애향 활동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고 도시에 사는 이들과 시골에 사는 용문인들의 정서를 이어주는 따뜻한 교감 역할을 해나가는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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