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다시 배우는 선비정신 (3화)
고향에서 다시 배우는 선비정신 (3화)
  • 예천신문
  • 승인 2019.07.3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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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향
귀향을 결정하고 세간살이들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큰 욕심 없이 살았음에도 집안 곳곳에서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없는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와 몇 번이나 놀랐다. 쓰임이 다 되었음에도 그 안에 담긴 지난 세월의 추억 때문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쟁여둔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잠시 마음이 애틋해졌다. ‘이런 부질없는 것들을 짊어지고 오느라 지난 세월이 그리 무거웠던가’하는 회한도 찾아 들었다.
 
대학진학으로 시작된 서울 생활은 인생 반년의 긴 세월을 훌쩍 넘기고야 끝이 났다. 뜨거운 청춘과 격동의 중년, 그리고 남들보다 바삐 살아온 노년의 추억과 시간들이 오롯이 기록된 공간을 떠나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특히 가장 발길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내 사람들’과의 이별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낙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법인데 오랜 세월 깊은 정을 쌓아온 이웃이나 지인들과 헤어져 홀로 낙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나는 발걸음을 붙들었다. 하지만 그 무엇이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하겠는가. 또 남은 생의 날들, 고향을 위해 오래 계획하고 소망했던 일들을 하나씩 이뤄보리라는 의욕이 머뭇거리는 발길을 고향으로 재촉하게 만들었다. 결정이 되자 소풍 전날 밤새 잠 못 이루던 초등학교 아이시절의 그때처럼 마음이 한없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예천은 회룡포라는 관광코스 외에도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회룡포(回龍浦)는 한반도 최고의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350도로 마을을 휘돌아 흐른다. 나머지 10도마저 물을 둘렸더라면 ‘육지 속의 섬’이 되었을 터이다. 낙동강 줄기의 하회마을이나 강원도 영월의 동강도 물돌이만 치면 여기에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전국적으로 이름 난 향교가 두 개나 있으며 정자와 누각은 110여개도 넘는다. 서원과 고택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벅차다. 신라고찰 용문사를 비롯해 청룡사 같은 유명 사찰만 14개나 되고, 절터도 15개가 넘는다.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두운선사가 창건한 용문사에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대추나무로 만든 목각탱이 있어 사계절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태어나고 자란 용문은 소백산 자락에 분지형태로 생긴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절경뿐 아니라 곳곳에 우수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다. 특히 이 일대 지역은 조선 말기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던 비서 《정감록》에서 전국의 명당으로 뽑은 십승지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다. 산과 계곡과 들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은 시인 아닌 사람들 입에서조차 절로 시심이 동하게 만든다. 또 산수 좋고 공기 좋은 곳 덕분에 마을 사람들도 하나같이 정이 두텁고 예를 갖춰 사람을 대할 줄 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탯줄을 묻은 이곳 용문을 떠올리면 어딘가에 든든한 보물이라도 묻어 둔 것처럼 항상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런데 귀향 후 마을 주변을 다니다보니 이 귀한 유적지들을 나만 구경하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지면을 빌어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산책 삼아 자주 찾는 초간정(草澗亭)이다. 정자는 맑은 계곡과 우거진 소나무숲 속 경치 좋은 암반 바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에 걸터앉으면 청아한 계곡 물소리가 귓속을 간질거린다. 이 자리에 앉아 자연에 순응하며 시(詩)와 서(書)를 논했을 고향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삶이 그려지는 순간이다. 좁은 사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뒤쪽과 오른쪽으로 아찔한 절벽이 이어져 있다. 자연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칸에는 마루를 설치했는데, 이 마루에서는 전면의 개울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조선 중기 초간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관직생활에서 벗어나 남겨진 여생, 자연을 벗 삼아 지내고자 했던 초간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1582년(선조15년)에 창건한 정자다.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중건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초간정(草澗亭)
▲ 초간정(草澗亭)

이 정자 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끼로 찍은 자국이 있다. 이것을 두고 두 가지 전설이 떠돈다. 하나는 옥매(玉梅)라는 기생이 장구춤을 추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자 화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은 것이라는 설이다. 두 번째 전설은 예천 권 씨들이 정자 주위를 거꾸로 백 바퀴 도는 자에게 이 정자를 주겠다고 해 어느 초립동이 아흔아홉 바퀴를 돌고 나머지 한 바퀴를 마저 돌다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익사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비극적인 사연답지 않게 소박한 모습의 건축물인 이곳은 절벽위에 자리한데다 북쪽과 서쪽으로 시야가 막힘없이 시원하게 트였고 바로 옆으로 맑은 금곡천이 흐르고 있어 남다른 경관을 자랑한다.

 
처마 밑으로 남쪽에는 ‘초간정사’ 북쪽에는 ‘초간정’ 동쪽에는 ‘석조헌’이라고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 중 초간정사라고 쓴 편액은 영주 출신의 문신 소고 박승임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박한 정자 풍경에 어우러지는 주변 경치도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초간정 옆으로 흐르는 개울에는 외국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소품같은 출렁다리가 놓여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가을에는 근처에 보라 빛 좀작살 나무열매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오색단풍들이 주변 경치를 한껏 풍성하게 만들어 경치를 음미하는 맛도 여간 아니다.
 
초간정 다음으로는 복천마을 초입에 위치한 병암정이 있다. 몇 해 전 드라마<황진이>에서 인기 여배우 하지원과 장근석이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초간정이 권 씨 종가의 웅장함과 어울리는 품격을 보여준다면 병암정은 좀 더 신선의 세상과 가까운 느낌이다. 본래 휴식과 학문 수양의 목적을 가진 곳이지만 탁월한 경관 덕분에 학업에 정진하기 쉽지 않을 성 싶다. 정자 우측으로는 옛 인산서원의 사당이었던 작은 건물이 권 씨 문중의 별묘로 사용된다. 장고한 세월 탓에 쇠락의 기운이 전해지지만 한창 때 가문의 이름을 모시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이곳에서는 여전히 고졸한 옛 선비의 품격을 전해진다.
▲ 병암정에서
▲ 병암정에서

절벽 아래 자리한 연못에는 수 백 년 된 왕버들과 바위 틈새로 자란 노송이 빚어내는 풍광은 차라리 한 폭의 산수화다. 특히 연못에서 정자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맛이 더욱 일품이다. 뜨거운 여름이면 연못에는 색색의 연꽃들이 만개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더운 날 혼자 산책 삼아 동네 마실을 나왔다 연못 앞을 지나칠 때면 연꽃에 얽힌 우스갯소리가 생각 나 혼자 껄껄 웃고 만다. 원래 연꽃은 욕을 하며 지나가야 어떤 연꽃인지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된단다. 잎이 두 쪽인 연은 쌍년이구, 밤에 피는 야한 년은 야개련, 피부가 흰 년은 백련, 빅토리아연은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해 만든 잎이 큰 년이란다. 그렇게 생김과 특색을 따 외우니 정말 연꽃들의 이름들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자태가 너무 고와 이름을 불러 보고 싶어도 미처 알 지 못해 부르지 못하는 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연꽃은 누구나 이름을 알고 부른다. 나는 그 소박함과 친밀함이 더없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화사한 자태도 아름답지만 더러운 진흙 속 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청결하고 고결한 의지로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연꽃은 우리 고장에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한 옛 선비들의 모습과 사뭇 닮았다. 특히 꽃잎에 물이 닿아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청결함은 요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뿌리는 진흙탕에 두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이야 말로 이 시대가 잃어버린 진정한 선비 정신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더운 여름 한 철 노구(老軀)를 이끌고 수없이 연못 앞을 오가며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바로 연꽃에 담긴 정갈하고 고매한 혼(魂)이었던 모양이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땅의 기운을 받고 성장한다. 오죽하면 풍수가들도 ‘인걸은 지령’이라 했고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용문이 특별히 신성하고 맑은 기운의 서린 덕분인지 나 역시 평생 맑은 정신으로 살아왔고 마지막까지 그 혼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요즘처럼 언행이 신중하지 못하고 천박하고 경솔한 말들을 부끄러움 모르고 쏟아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보다 보니 내 고향 용문의 유적지들이 유구한 세월동안 지켜내 온 선비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스스로 권력을 경계하고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조선 선비의 올곧음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미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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