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실 마을에서 그리운 유년과 만나다 (5화)
금당실 마을에서 그리운 유년과 만나다 (5화)
  • 예천신문
  • 승인 2019.07.3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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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향
고향에는 그리운 추억의 장소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금당실 마을은 천둥벌거숭이 시절부터 함께 자란 부랄 친구들과의 기억이 가장 많이 남겨진 곳이다. 그 때문인지 무료할 때면 용문면 한가운데에 있는 금당실 마을로 산책삼아 길을 나서곤 한다.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돌담길, 선조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고택, 문화재가 옛 형태 그대로 오롯이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조선 중기 <정감록>에 난세에도 전쟁이나 흉년의 피해가 없는 길지로 꼽은 십승지(十勝地)중 하나로 병마가 들지 못한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영험한 기운을 높이 산 태조 이성계는 금당실을 도읍지로 정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이성계는 신하에게 닭을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에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명했는데 닭이 도착하기 전에 울었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한다. 국가의 수도를 정하는 중대사를 한낱 닭 울음에 의지했다는 것이 다소 어이없지만 이 때문에 금당실은 조선의 중심지가 될 뻔한 행운을 놓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쁜 운을 막아주는 땅의 특별한 기운덕분인지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수많은 마을들이 전란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파괴되었던 것과 달리 큰 화를 입지 않고 마을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예언가이자 풍수지리가인 남사고도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한양과 유사하나 강이 없어 크게 아쉬워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백두대간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한천과 금곡천은 주변에 옥토를 만든다. 경북지방에는 ‘금당맛질 반 서울’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천과 한천의 상류인 금곡천 사이에 있는 두 마을을 말하는데 이곳은 전형적으로 산수(山水)가 교합하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금당실과 맛질 사이 작은 고개에 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도 세웠다.
 
금당실은 윗금당실(상금곡리)과 아랫금당실(하금곡리) 모두를 일컫는다. 보통 금당실로 불리는 상금곡리는 농촌 마을로는 보기 드물게 커서 행정적으로 동촌 서촌 남촌 북촌의 4개리로 나눈다. 세 갈래 중 가운데 줄기인 오미봉 아래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혈맥을 따라 북촌, 동촌에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오래된 가옥들이 많다.
 
금당실 한옥마을의 특징은 나지막한 돌담과 구불구불한 정감어린 골목길이다. 다른 지역의 여느 양반 고택과는 다르게 이곳의 고택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금당실의 고택길을 따라 걸으면 이어진 돌담이 정겹게 동행한다. 주택 사이를 미로처럼 이어주는 얕으막한 돌담길은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다. 옛 날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북촌과 동촌은 내부적으로 순환하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풍광이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은 영화 씨받이(1970년대),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의 촬영지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는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모신 추원재 및 사당,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모신 반송재 고택, 원주 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모신 사괴당 고택,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이 있던 터가 남아 있다. 이분들 중 법무대신 이었던 이유인 대감은 금당실 소나무들을 특히 아꼈던 양반으로 당시 동학운동 당시 노비구출자금 마련을 위해 소나무들이 마구잡이로 벌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고택을 짓고 거처하며 송림을 지켜내신 분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옥 체험 마을로 바뀌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금당실은 어린 시절에도 우리 동네에 비해 사는 형편이 나은 집들이 꽤 있었다. 나이가 어려도 친구들의 사는 형편 정도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다 같이 어울려 놀긴 해도 금당실 아이들과는 항상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 쪽 동네 아이들도 가끔 심통이 나면 용문 무리들이 자기네 동네로 마실 오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럴 때면 어찌나 분하고 서럽던지 친구들과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하자’고 결의를 다지고는 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보다 더 호기롭고 각별했던 그때의 추억들이 한껏 서린 동네라 그런지 금당실 쪽으로 가는 길은 바라만 봐도 눈물겹게 그립고 정겹다.
▲ 금당실 전경
▲ 금당실 전경

그동안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는 동안 필설로는 다 표현 못할 만큼 눈부시고 아름다운 마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고향 용문만큼 금당실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은 세계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풍경과 고즈넉한 평온함이 깊이 배인 금당실 마을의 풍경과 분위기야말로 요즘 사람들이 꿈꾸는 힐링 장소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적으로 금당실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든 지형은 소백산 줄기의 높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둘러싼 넓은 들과 마을을 가로질러 굽이치는 금곡천이다. 다만, 풍수적으로 마을 입구 쪽에 막힘없이 터진 부분이 풍수상의 허점으로 지적이 되어 1500년대에 이런 풍수적으로 약한 지세의 복을 북돋우고 겨울철 북서한풍을 막아볼 요량으로 지금의 금당실 명물인 솔숲이 조성되었다.

 
용문중이 자리한 오미봉을 따라 용문초등학교 입구까지 500m 길이로 만들어져 있어 용문초등학교의 어린 후배들은 애써 화단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학교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 한 가운데 자리해 있는데 그 어떤 비경이 눈에 차겠는가. 솔숲은 대체로 수령 250~300년이 넘는 소나무 거목들이 하늘을 향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소나무 향에 취해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6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원시림과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특히 안개 짙은 날 운무에 쌓인 소나무 숲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이 빚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젊어서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고향 풍경을 수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금당실도 예외는 아니라 용문을 찾을 때마다 계절 별로 색깔을 달리하는 솔숲의 풍광을 앵글에 담아왔다. 금당실 솔숲의 가장 큰 매력중 하나는 곧게 뻗지 않고 구불구불 휘어지고 잔가지가 많은 소나무들의 모양새다. 마치 그 모습이 숱한 풍파와 역경을 견뎌낸 인간의 주름진 얼굴을 연상시켜 카메라를 들이들 때마다 괜스레 짠하고 애틋하다.
 
나이 드니 지나간 시간은 모두 그립고 간절한 추억이 된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그 절실함이 더 깊을 것이다. 까까머리아이 때부터 용문의 들과 산, 골목과 골목을 오가며 천지 없이 뛰놀던 친구들 중에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동무도 있고 오래 전 연락이 끊어져 생사조차 모르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이 생에서 두 번 다시 볼수 없는 그 친구들을 나는 이제 복천과 금당실 마을 곳곳에서 매일 같이 만날 수 있다. 산책길을 나서면 낯익은 얼굴들이 귀에 익은 고향 사투리로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다.
 
‘찬주야 니 어데 갔다 인자 왔노? 니 얼굴 다시 본께 억시 반갑다’
 
그리운 추억 속에 매몰되었다 다시 살아 난 그 얼굴들과 마주할 때면 나 또한 어린 시절 그때로 돌아가 아이 같은 반가운 말투로 대꾸한다.
 
‘참말로 좋다. 고향에 돌아 와서야 여전히 살아 숨쉬는 너희들과 다시 만나니 정말 행복하다.’
 
흘러간 세월은 내게서 많은 것을 선물로 주었으며 동시에 소중한 것들을 앗아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향에는 사라진 애틋한 기억들이 추억의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그 오래된 기억의 장소에서 옛동무들의 그림자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망구의 하루를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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