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의 정 보다 뜨거운 것은 없다 (12화)
혈육의 정 보다 뜨거운 것은 없다 (12화)
  • 예천신문
  • 승인 2019.09.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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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가족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 부모와 혈육의 복이라는데 살아 갈수록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얻은 모양이라 마음 뿌듯하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덕도 능력’이라 말한다고 한다. 또 빈곤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처지를 빗대 흙수저 인생이라고 부른다는 소리도 들었다.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세상에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부모께 입은 은혜는 다할 수 없는 것인데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 부모의 능력과 재산을 따져 흙수저니 부모 운이니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공경을 사람의 으뜸 된 도리로 알고 산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와 동생들은 흙수저 중에서도 진흙 수저라 할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은 표현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누구 한 명 원하는 것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먹을 것은 늘 부족했고 새 옷은커녕 항상 누군가의 헌 옷을 물려받으며 살아왔다. 밤새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기름을 아껴야 해 달빛에 책을 읽은 날도 있고 부모님을 도와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우리 뿐 만아니라 그 당시 아이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거나 없는 집안에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탈 없이 건강히 낳아주신 것에 감사했고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 건사하느라 애쓰시는 제 부모를 안쓰럽고 애틋하게 여겼다.
 
지금도 감사한 것은 내 밑의 세 동생 모두가 성정이 맑고 선한 아이들 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려운 형편 중에서도 장남인 나는 집안의 기대 속에서 비교적 많은 혜택을 받았다.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 성공해야 아래 동생들도 살 길이 열린다는 어르신들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나 또한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장남인 내가 여보란 듯 성공해야 한다는 각오로 밤낮없이 학업에 매달렸다. 노력 덕분에 명문 경북고에 진학해 부모님의 자랑거리도 되어 드렸고 서울 연세대에 진학해 명문대생의 목표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큰 형인 내가 도시에서 공부하는 동안 맏이인 내 몫의 많은 집안일들은 모두 큰집의 양자로 간 동생 봉주와 도명의 몫으로 돌아갔다. 거기다 매달 적잖은 유학비를 마련하느라 안 그래도 변변치 않은 살림은 더 빠듯해졌다. 그런데도 고향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마주하면 동생들은 내 앞에서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한창 들끓는 사춘기의 나이에 한번쯤 형 앞에서 불만을 터트릴 법도한데 동생들은 묵묵히 자기 몫의 책임들을 해나가며 부모님을 도울 따름이었다.
 
동생이 나에게 반항을 한 것은 평생 딱 한번이었다. 바로 둘째 동생 봉주였다. 아우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다. 남들은 붙잡고 시켜도 싫어하는 공부를 동생은 스스로 즐기면서 할 줄 알았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니 대학 진학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장남 한명 공부시키는 것도 벅차고 힘겨워 하시던 부모님께 동생의 꿈은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성정이 온화하고 유순한 봉주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형편 때문에 큰집으로 양자는 갔지만 마음으로 늘 부모님과 형을 존중하고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는 곧은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처음으로 부모와 형 앞에서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마 그 만큼 포기할 수 없던 간절한 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두의 설득에도 동생의 뜻은 강했고 쉽게 꺾이지 않았다.
 
▲ 필자 4남매
 
연희동에서 셋방을 살 때의 일이다. 결국 나는 동생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속내는 동생이 아닌 무능한 내 뺨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성내는 일이 없던 형이 그렇게 나오자 동생은 마지못해 포기의사를 밝혔고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동생이 꿈을 펼치게 돕지는 못할망정 주저 앉혔다는 죄책감은 한동안 돌덩이처럼 가슴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다행이 동생은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방법을 찾다가 경찰학교를 졸업해서 고급 경찰공무원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그리고 대학 진학에 대한 동생의 열망은 영민한 두 조카들이 원 없이 이루어 주었다. 모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장조카 장낙원은 재학 중에 사법, 행정 양과를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고 둘째 조카 장낙우는 서울의 광운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학과장으로 있으니 그야말로 세상 부모들이 간절히 바라는 성공한 자식농사를 일군 셈이다.
 
둘째 아우 봉주 뿐 아니라 셋째 동생 도명과 여동생 순규도 모두 큰 기복 없이 다들 행복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며 잘 살아가고 있다. 힘든 세월을 함께 견뎌 온 집안의 맏이로서 그 사실에 대견하고 감사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세 동생은 어려서 부터 장남인 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와 주었다. 집안이 번성하려면 형제간의 우애만큼 위계질서도 중요한 법이다. 부모님이 먼저 맏이인 나를 존중하고 예를 갖춰 대해주시니 동생들 역시 어떤 경우에도 형인 나를 깍듯이 대접해 주었다. 지금도 동생들은 집안의 크고 작은 경조사가 생기면 항상 나와 먼저 상의해 함께 의논한 끝에 결정을 내린다.
 
이처럼 한 집안이 잘 풀려나가려면 형제간의 예의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맏이는 손아래 동생들을 존중하고 동생들은 맏이의 권위를 믿고 따르는 자세가 이루어져야 가풍도 바로 서는 것이다. 믿음직한 장남이 되기 위해 나도 노력했지만 동생들도 평생 소홀함 없는 마음으로 나를 대해 왔기에 지금껏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 새어나는 일 없이 의좋은 형제애를 지키며 살아올 수 있었다. 거기다 다들 큰 사고나 아픈 일 없이 무탈하게 황혼들을 보내고 있으니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형제만큼 좋은 벗이자 재산은 없는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은 복 많은 인생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소망 하나를 더 이룰 수 있다면 고향 산자락에 마련해둔 가족 묘원에 언젠가 이 생을 정리한 우리 사남매가 다시 한 가족 한 형제로 만나는 것이다. 그곳에서 태산처럼 크신 젊은 날 부모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 있다

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몸을 누이던 좁고 협소했던 용문 집 그 시절처럼 의좋고 따뜻했던 어린 내 형제들과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 나눠볼 수 있다면 또 무엇을 욕심내겠는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리운 그 시절, 사랑하는 내 가족, 내 고마운 아우 들과 어여쁜 오누이가 여전히 곁에 남아 있어 나는 참으로 따뜻하게 잘 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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