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흐름을 한 호흡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서예입니다. 글의 볼륨, 각도, 힘 이런 것을 한 번에 모두 써내야하죠."
지난 5일 용문면 '초정서예연구원'에서 만난 서예가 초정 권창륜 선생은 무수한 훈련이 있어야만 한 획, 한 획이 나올 수 있는 이유로 이렇게 서예의 '일회성'을 꼽았다.
서예는 한번 붓을 잡으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놓지 않으며, 고쳐 쓰거나 덧칠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체에 따라 법도, 법서에 맞게 썼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입니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모든 서체를 섭렵해야 하고, 서체마다 점을 어떻게 찍어야하는지, 획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해진 법서'를 따라 써야 한다. 그 법서들은 서체마다 직접 글자들을 써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고, 수없이 많은 반복과 훈련이 필요한 만큼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린다.
"불광불급이라고, 그래서 미치지 않고는 미칠 수 없다(경지에 도달하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권창륜 선생은 미쳤다고 느낄 만큼, 남들 눈에 미쳐 보일 만큼 열심히 해도 여기까지는 모두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서예가다 말하려면 자신의 풍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개성이 없는 거죠.
말하자면 '왕희지체'의 법서를 따라 썼어도 그 안에서 누구누구의 풍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정해진 틀 안에서, 그 틀을 이해하고 소화한 다음 그 안에서 다시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새롭게 창조해 내어야만 한다.
"예쁘게만 쓴 글은 마치 보톡스 맞은 것처럼 자연스럽지 않아요. 너무 반듯한 것은 위축되고 조심스러운 겁니다."
색도 없이 오로지 글의 모양으로 표현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신이 나면 글도 흥짝흥짝 춤을 추고 슬프면 찌그러지고...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잘 표현한 것이야말로 최고죠."
하지만 정해진 틀에 따라 글을 쓰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참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김정희 선생의 추사체 이후에 이렇다할만한 서체가 나오지 않고 있는 거죠."
사람들은 선생의 글을 '초정체'라 부르며 매료되었지만, 선생은 자신의 글을 아직은 덜 곰삭은 부족한 글이라고 평하며 지금도 자전과 옛 문헌을 찾아보며 본인만의 작품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글은 심화이자 체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그림이자 쓰는 사람의 생김새까지 닮았다는 소리죠. 서예가의 글이 아니어도 철학적 사유나 학문적 깊이가 다른 사람들은 구성하는 것부터 달라 알 수 있고, 몸이 큰지 작은지, 성격까지도 글을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의 말처럼 고령의 나이임에도 단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곁에 있는 사람을 압도하는 그의 모습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에 드러나고 서예에 미친, 그래서 경지에 도달한 대가의 모습을 작품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사실 어려운 것처럼 느껴져도 붓을 잡고 굴곡을 느끼면서 써보면 금방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흥미를 느끼고 난 다음 거기에 빠질지 말지는 각자의 몫이라 해도 빠르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키보드 대신 한 번쯤 붓을 잡아보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