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수님께 드리는 제언 '반학정(伴鶴亭) 복원 제안’
예천군수님께 드리는 제언 '반학정(伴鶴亭) 복원 제안’
  • 예천신문
  • 승인 2023.04.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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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욱(보문면출신)

문화공간의 재생 및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노고에 심심한 경의를 드리면서 아울러 예천의 역사인식에 대하여도 높은 관심을 가지신 군수님께 깊은 호의를 드립니다.
지나쳐 버리거나 묻혀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발굴하여 알리려고 하는 것은 후대를 사는 사람의 의무이며 보람으로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우리 고장의 뿌리를 찾아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묻혀있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하여 혹여나 지나치는 우를 범하지 않고자 하는 바람에서 축향인으로서 외람되나마 고향을 사랑하고 발전을 기원하는 충정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수학하던 장소인 반학정의 발굴 복원을 제안하는 것입니다.(이하 설명문은 존칭 생략)
다산이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 정재원(1780)을 따라 예천에 머물은 적이 있었다.

군청 청사와 이어진 바로 동쪽에 돌계단으로 둘러진 작은 연못 주위에 화초가 많이 심어져 있고 울타리로 쳐져 있는데 높이 솟은 나무가 있는 곳에 반학정이라는 폐허가 된 정자가 군청 청사와 이어진 바로 동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손질하여 이곳에서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가끔은 청사 본청으로부터 취조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조석으로 찾아가 아버지의 누가 되지 않도록 문안을 드리며 내성천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거닐면서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당시 예천의 한 단면을 기술한 반학정기(伴鶴亭記)라는 글을 쓰고 또한 선몽대기(仙夢臺記)라는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산은 아버지를 따라 예천을 떠난 훗날 귀양지 강진에서 예천을 그리워하며 예의가 바르고 유교를 숭상하는 양반의 고장이라고 회상하면서 공맹의 고향이라는 뜻에서 추노지향(鄒魯之鄕)이라고 극찬을 아까지 않았다고 한데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천을 떠난 후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연달아 함으로서 정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정조의 화성 행차를 돕기도 한 탁월한 진보적 실학자로서 과학자이고 철학자이다. 사상가이기도 한 그는 성곽에서도 뛰어난 정조의 행궁을 위한 수원성의 설계와 시공을 총괄한 축성가로서 오늘날 이 성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이 높이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수원성이 이 분의 작품이다.
천주교 박해의 소용돌이에 몰려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학문연구로 이겨내면서 5백여 권의 방대한 저술과 2천5백여 편의 시문 창작은 학문 세계에서 그의 업적으로 오늘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반학정 복원의 당위성 및 필연성>
1. 위대한 다산을 기리는 뜻에서 이 분의 발자취가 서려 있고 인생 설계를 하던 바로 이 자리에 반학정의 복원은 향토문화 활동의 핵심이 되기에 충분함.
2. 야심에 찬 비상한 꿈을 갖고 젊은 시절 학문 연구에 매진하면서 인생설계를 하던 곳으로 이 분에게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으로 예천의 이미지를 달리하고 격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됨.
3. 문화의 발자취를 더듬고 재발견하여 관광지 혹은 명승지로 다투어 개발하고 있는 현상이 시대적인 추세로서 여타 지자체에 비해 비교 우위에서도 손색이 전혀 없음.

<반학정의 복원은 예천인에게 축복이요 행운이다>
반학정기와 선몽대기란 시문을 남기고 예천을 떠났지만 반학정이란 이름만은 남아서 시중에 회자되면서 약 2백여 년의 세월을 미지의 장소로 알려지면서 하나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정체불명의 반학정에 대하여 다산과 관련된 사실(예천신문 471호 외 6회의 기고문)을 알림으로써 반학정의 정체가 밝혀졌다.
다산의 호는 당초에는 사암(俟菴)이라고 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혜안에 따라 기다리라는 뜻으로 백세오가사(百世吾可俟)라고 즐겨쓰던 그의 말에서 시사하듯 일백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밝은 빛을 보이며 그의 학문은 세계적인 연구와 실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이 간 지 백년 후 다산 정약용을 두고 “선생 일인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의 연구요 조선의 심혼에 관한 연구요 전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관한 연구다”라고 하여 그의 사상을 한국근대사의 초석임을 지적하면서 다산이 간 지 일백년이 된 1930년대에 학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결론>
다음 백년의 행사(2020년대)는 예천에서 갖는데 뜻을 두고 이에 수반한 반학정 복원은 절대적인 과제로서 예천인 모두에게 긍지를 갖는 호응과 지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추노의 고장이라는 명예에 걸맞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역사적 관광적 요소가 될 명소의 탄생을 확신하면서 이를 기념하고 기리는 조형물로서 이의 복원은 지연 혹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임으로 조속한 실현을 소망하면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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