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처단 계획 세워"
"매국노 처단 계획 세워"
  • 예천신문
  • 승인 2001.12.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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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이재명 선생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재명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6년 10월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서 노동에 종사하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미 본토로 옮긴 뒤,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1905년 4월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창설된 공립협회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이 의열투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공립협회에서의 활동과 이후 헤이그특사사건·광무황제 강제 퇴위·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 급박하게 전개되던 망국 상황을 목격하면서부터이다.

특히 공립협회가 국내와의 연계 활동을 강화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는 매국노를 처단할 의열투쟁의 실행자로 자원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1909년 1월 융희황제의 서도 순행 때, 평양역에서의 이토오 처단 시도였다.

그러나 융희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이토오 처단을 실행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로 가 기회를 엿보다가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하며 나라와 민족을 판 매국노들에 대한 처단을 동지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완용을 비롯한 이용구·송병준 등이 그 주요 대상이었다.

이완용 처단 책임을 맡아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던 그를 공격할 수 있었다. 제지하는 차부를 제끼고 이완용의 허리·어깨 등 3곳을 공격하여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침략의 일본측 원흉인 이토오가 처단된데, 이어 민족 반역자에게 정의와 민족의 심판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민족적 기개는 경시청에서도, 법정에서도 유감없이 표출되어 민족대중을 각성시켰다. 결국 1910년 5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받고, 그해 9월 30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이때 나이 불과 24세였지만, 오늘날도 민족혼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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