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로 망명해 신민부 결성"
"만주로 망명해 신민부 결성"
  • 예천신문
  • 승인 2002.04.1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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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김혁 선생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혁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75년 10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서 무관학교의 교육을 통해 습득한 근대적 사고와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1900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시위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제의 침략을 목격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이 더욱 고양되었다. 그리하여 육군 정위로 시위대에서 근무하던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낙향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면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에 대한 정신무장을 한층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이 발발하자 향리인 용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처음 서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를 찾아가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 뒤 북간도로 옮겨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청산리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참변 이후 만주로 귀환한 뒤에는 대한통의부, 대한독립군정서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을 통해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지향하고, 위축된 군세를 회복하며 무장투쟁역량을 강화해 간 것이다.

나아가 북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일 조직으로 1925년 3월 신민부의 결성을 주도하여 행정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로써 남만주의 정의부와 참의부, 북만주의 신민부로 정립된 3부 시대를 열었다. 신민부는 관할 지역 한인 동포들에 대해 민족 자치를 실시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28년 1월 만주 석두하자역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 경찰대의 합동 습격으로 10여명의 신민부 간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후 신의주로 이송되어 192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을 받고, 신의주형무소·평양형무소·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의연하게 일제의 회유 압력에 굴하지 않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중병을 얻어 1936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되었다. 이후 향리에서 요양하였으나 옥고로 인한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9년 4월 23일 64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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