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희로애락 같이 해'
'인간과 희로애락 같이 해'
  • 예천신문
  • 승인 2011.01.1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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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牛公)'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세시풍속 이야기(24)
농경시대 우리 조상들은 소를 신성(神聖)하게 여기고 가족과 같이 돌봐왔다. 그래서 소를 우공(牛公)이라 하여 높여 불렀다. 소에 얽힌 전설이나 속담들도 세시풍속과 더불어 인간과 함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해왔다. 그런데 요즘 구제역(口蹄疫)이란 몹쓸 병으로 한우의 비명이 전국에 울려퍼지고 영화에서 보던 ‘워낭소리’는 소가 절규(絶叫) 하는 비극으로 바뀌고 있다.

잘 알다시피 ‘구제역’은 가축의 입(口)과 발굽(蹄)에 물집이 생기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 소, 돼지, 양, 사슴처럼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동물(우제류·偶蹄類)에서 발생하는 병이다. 50도씨 이상 열만 가하면 인체엔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한다. 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포유류(哺乳類)이다. 가축으로 길들여진 것은 이미 인류가 농사를 지을 때부터 역우(役牛)로 이용한 8천여년 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지증왕 때 소를 밭갈이에 이용하도록 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미 그 전부터 이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소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선시대엔 함부로 도축(屠畜)하지 못하도록 요즘 한우농가와 같이 우적(牛籍)을 두었다. 뿔의 모양이나 털의 색깔, 가마위치 등을 기록한 우적 대장은 얼마 전까지만도 행정기관의 주요 장부였다. 과거 우리에게 소는 재산목록 1호요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자 든든한 일꾼이었다.

뿐만 아나라 자식이 대학들어갈 때 입학금으로 사용되고, 딸 시집갈 때 혼수비용으로 드는 돈은 소의 몫이었다. 필자도 60년대 초 대학 입학금을, 집에서 기르던 암소로 충당하였다. 입학금이 7천3백원이었는데 소값이 7천2백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젊은 이들은 생소할지 몰라도 그 당시 대학을 상아탑(象牙塔) 대신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렀던 것도 다 소 때문에 생긴 말들이다.

현대에서는 소를 여러 마리 사육하지만 과거에는 암송아지 한 마리 사다 송아지를 몇 마리 낳을 때까지 기르면서 ‘일소’로 이용하였다. 농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전부 다 알겠지만 소를 키우는 몫은 대부분 어린 자식들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꼴을 베고, 먹이고, 뜯기고, 마른 짚을 작두에 잘게 썰고 무쇠가마솥에 소죽을 끓이고 외양간을 청소하는 등의 일들은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다.

소에 대한 의(義)로운 전설도 많이 있다.

구미시 산동면에는 의우총(義牛塚)이 있다. 충직한 소의 무덤이다. 조선 인조 때 김기년이란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갈 판이었는데 소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해 소가 죽은 후 자기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으로 만든 소무덤이다. 무덤 뒤쪽에 8폭 우의도 석병풍이 있다. 이 외에도 은혜 갚은 갑사 공우탑 이야기, 칡소의 호랑이 쫓은 전설, 중국 황제 욕심을 막은 이천의 금송아지 이야기, 진해 소가 된 중 이야기, 불교의 심우도 이야기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소 이야기가 많다.

소에 대한 속담도 많다. ‘꺼먹소도 흰송아지 낳는다’ ‘눈먼소에 멍에가 아홉이다’ ‘뜨는 소도 부리기에 달렸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어라’ ‘소가 크다고 왕노릇 할까?’

농가에서 입춘이 되면 ‘우여남산호 마사북해용(牛如南山虎 馬似北海龍)’이라는 입춘첩도 써붙였다. 애지중지하던 소를 살처분하는 고통이 하루 빨리 지구상에서, 한반도에서 사라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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