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과 농민이 주로 입어'
'서민과 농민이 주로 입어'
  • 예천신문
  • 승인 2011.12.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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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길쌈(3)

◇ 정 희 융 (전 예천교육장)
●세시풍속 이야기(43)

지난 호에서 삼베가 씨앗이 심어져 옷감으로 될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봤다. 삼베는 여름옷감이긴 하지만 무명이 귀할 때는 사시사철 겹으로 만들어 입었다. 베옷은 주로 일반서민과 농민에겐 의식주(衣食住) 중에 제일이었다. 원시인이 아닌 이상 옷은 입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농번기(農繁期) 낮의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밤이 이슥하도록 삼 삼기하던 우리네 부녀자들은 모기와의 전쟁이요 무릎에 뚝살이 베기도록 삼을 삼았다.

“베잠방이 호미 메고 돌아오니, 지어미 술을 거르며 내일 뒷밭 매옵세 하더라.”

조선 정조 때 신희문의 바쁜 농사철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시조의 베잠방이는 삼베로 만든 남자옷으로 가랑이가 무릎까지 만든 홑바지이다.

‘샛별지자 종달이 떴다. 호미 메고 사립나니, 긴 수풀 찬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는다’라는 시조에도 베잠방이 나온다. 베잠방이는 바지이지만 베적삼이라고도 하며 고름이 없이 단추로 여밀 수 있게 만든 홑저고리로 통째 세탁하기에 편리한 서민(庶民)들의 의복이다.

유행가(流行歌) 가사에도 ‘서울이 좋다지만…… 베적삼만 못하더라’고 하였다. 베(布)라고 하면 삼실, 무명실, 명주실 등을 다 말하지만 삼베의 준말을 베라고 통칭한다. 조상들의 묘지(墓地) 이장시에 베적삼을 수의(壽衣)로 했던 것도 볼 수 있고 아직까지 상복(喪服)을 삼베로 하고 있다. 음식상을 덮는 상보도 공기가 잘 통하는 삼베 짜투리로 만들어 썼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오기 이전에는 의복은 거의 삼베였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태자는 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자 천년사직(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하여 개골산(皆骨山·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가 삼베옷 입고 살았다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한다.

요즘에야 안동포(安東布) 베옷에 풀을 빳빳하게 먹인 여름옷으로 장만하는 이는 상류층이지만 옛날엔 죄 지은 이나 낮은 신분을 일컬을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이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라는 글에 ‘신본포의(臣本布衣)’라는 문장이 나온다. 포의(布衣)는 글자대로는 무명이나 삼으로 지은 옷이니 벼슬이 없는 사람의 의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민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조선 최고 경주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家訓) 내지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베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이 집 종부(宗婦)는 치마를 얼마나 깁어 입었던지 빨래 삶을 때 치마 하나가 가마솥 하나 가득 하였다고 한다. 근검(勤儉)과 절약(節約)의 본보기이다.

여름철 일없이 놀기만 하며 삼베옷, 삼베요 이불, 삼베 베개에 죽부인(竹夫人) 안고 한가하게 피서(避暑)하는 졸부(猝富)에게는 귀찮은 이야기이다.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 비 맞아……라는 시조에 임금의 승하(昇遐) 소식 듣고 슬퍼한 베옷 대목도 있다. 포건(布巾), 포목(布木), 포선(布扇)도 베로 만든 물건이다. 버꾸기를 포곡조(布穀鳥)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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