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구국 항쟁에 앞장선 의병장'
'항일 구국 항쟁에 앞장선 의병장'
  • 백승학 기자
  • 승인 2012.08.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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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경북도 선정 7월의 독립운동가 … '장윤덕 선생'

▲ 보문면 수계리 묘역.
경상북도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예천이 낳은 한말 의병장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 선생을 선정 발표했다.

우리나라 대표 시인 중 한명인 박목월은 ‘일제의 간악한 마수가 뻗쳐 이 나라 이 강산을 삼키려 할 때 밤하늘 높이높이 횃불 켜들어 겨레를 깨우쳐 한 몸 사루신 아아 장윤덕 의사 의로운 뜻은 영원히 빛나리라 겨레와 함께’ 라는 추모가를 써 선생의 의기와 뜻을 기렸다.

성암 장윤덕 선생의 본관은 단양,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이며, 1872년 7월 6일 예천읍 노상리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품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굳고 담력이 컸다. 애국심 또한 투철해 항상 국가의 쇠퇴함을 개탄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한학(漢學)을 배우고 일찍이 보문사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 강개하여 수서기직을 그만두고, 국민들에게 항일 구국 정신을 강조했으며, 친일 반역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등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후 1907년 4월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매국대신인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 고향으로 내려와서 재기를 꾀하였다.

1907년 4월,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장윤덕 선생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백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 의병과 합세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奉化), 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醴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보조원(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 27일 의병 3백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1907년 9월 3일 문경읍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동월 10일에는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경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와 미하라(三原) 소위(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본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 공격에 이어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공격하여 일본인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던 중, 대구수비대에서 출동한 다나카(田中) 대위의 1개 중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장윤덕 의병장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장윤덕 선생은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라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고 하여 일경을 크게 꾸짖고, 갖은 악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앞니로 혀를 끊어 끝내 함구로 저항하였다.

▲ 경북대 교정의 기념 비문.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겨우 35세였다.

그 후 일본군 수비대가 장윤덕 의병장의 집을 불태우는 등 탄압이 극심해지자, 부인 함녕김씨(咸寧金氏)는 어린 두 아들 시환(時煥)과 인환(寅煥)을 데리고, 낮에는 보문면 수계리 산속 토굴에서 지내고 밤에는 논, 밭으로 다니며 보리와 벼이삭으로 연명하였다.

부인 함녕 김씨는 1942년 장윤덕 의병장의 순국 35주년 되던 기일(忌日) 날에 세상을 떠났다.

장윤덕 의병장의 묘지는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에 위치한 보문사(普門寺) 근처에 있으며, 전 재대구군민회장을 역임한 장기웅 씨가 손자다.

묘비는 장윤덕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1967년 9월 16일 장윤덕 의병장 서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세웠는데, 묘비 전면에는 ‘義兵大將惺菴張胤德先生之墓(의병대장 성암 장윤덕 선생지묘)’라 적혀있다.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그리고 묘갈명(墓碣銘)은 김인(金仁) 경상북도지사가 지은 것이다. 장윤덕 의병장 묘갈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사직(社稷)이 무너질 제 일천년 의병 몰아/ 왜적을 무찔다가 의혈(義血) 뿌리시니/ 의혈(義血) 영켜 반석(盤石) 되고 반석(盤石) 위에 나라 섰네./ 이제사 비 바람친다 쓰러지리,/ 임이여! 원한(怨恨)의 두 눈 감으옵소서.'

광복 20주년이 되던 1965년 10월 30일 장윤덕 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대구시 산격동 경북대학교 캠퍼스 안에 큰 규모의 돌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맨 위에 세로로 크게 ‘장윤덕의사순국기념비(張胤德義士殉國紀念碑)’라 음각으로 새겨 넣었고, 그 아래 기념비 비문이 역시 작게 음각되어 있다.

위의 “張胤德義士殉國紀念碑” 글자는 장의병장의 동생 장윤강이 썼으며, 기념비문은 배학보가 짓고 최원봉이 썼다고 적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조국이 광복된 지 스무 해 되는 오늘 나라의 기둥 될 준재들이 모인 이곳 경북대학교 뜰에 드높이 돌을 세우고 의로운 사적을 새겨 이 땅의 젊은 학도들에게 길이 전하니 후진들은 명심할지어다.’ 라는 글귀가 장윤덕 의사의 발자취를 통해 후학들에게 호국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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