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암정(屛巖亭)에 대하여...'
'병암정(屛巖亭)에 대하여...'
  • 예천신문
  • 승인 2013.02.06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회동 ㆍ용문면 출생 / 수성엔지니어링(주) 상무이사/ 기술사
용문면 초입에 있는 병암정은 경관도 아름답지만,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출판된 「예천 금당 맞질 마을」(2004) 이라는 책에 의하면, 원래 용문사 계곡에서 내려오는 금곡천 물줄기와 선리의 청룡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병암정 앞에서 합해져 굽이쳐 흘렀으며, 그 옆으로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금당실 쑤(송림·천연기념물 469호, 문화재청: 2006.3.28)가 현재는 비록 5백여 미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오미봉으로 부터 2km에 이르도록 병암정 앞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서 그 경치가 아주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병암정은 구 한말 명성왕후와 아주 가까웠던 양주대감(이유인)이 용문에 정착하여 1897년 세운 정자라고 하며, 처음에는 옥소정이라 불렀습니다만, 나중에 병암정(屛巖亭)이란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그 뜻은 병풍처럼 바위가 섯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병암정에 올라 오미봉쪽을 올려다보면 용문이 왜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도 제일가는 천하의 명당인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라는 내용이 조선시대 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한성판윤(서울시장), 법무대신을 역임하고 주로 명성왕후의 밀명을 수행했던 이유인이 용문에 정착한 사연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이유인은 풍수지리설에 기초한 정감록의 내용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용문에 자리 잡지 않았나 싶습니다.

양주대감(이유인)이 용문에 들어와서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강제 부역등 횡포를 많이 부려 지역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명성왕후 사망(1898년) 이후에 정치적인 권력의 힘이 쇠퇴하고, 1907년 사망한 이후 옥소정은 완전히 방치된 상태에서 예천권씨들에 의해 병암정으로 개명되고, 예천권씨 조상을 모시는 별묘 건물이 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병암정은 금당실의 양반가문인 예천권씨의 조상을 모시는 별묘가 있는 관계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다소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는 병암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긴 하나, 이곳을 찾는 이유가 병암정이 최근에 `황진이'라는 TV드라마 촬영장이였다는 사실만 알고 찾아온다는 것은 병암정의 역사적 의미는 전혀 도외시된 부끄러운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에 문화재청과 관광공사에서는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더 고양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찾고 개발하는 사업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하며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고 있는 이 시점에, 지역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그대로 사장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천 권씨 후손 분들에게는 다소 죄송스런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암정은 당초의 정자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많은 외부 사람들이 자유롭게 찾을 수 있는 개방된 장소로 단장하여, 동양 정신문화의 한 축을 이루었던 무형문화인 풍수지리학설에서 천하명당이 어떤 곳인가를 직접 볼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고 주변을 풍수지리와 관련된 관광지로 개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예천은 삼강주막, 회룡포에 이은 `천하명당 금당실'이라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또 다른 문화재를 갖게 될 것이며, 이것은 우리 예천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 지역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지역의 역사를 바로알고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예천사람들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