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알게 돼 기뻐
생사를 알게 돼 기뻐
  • 예천신문
  • 승인 2016.06.2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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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오 기 ·6.25 전쟁 납북자 가족 ·감천초등학교 동문회 고문, 감천면민회 고문, 초등학교 교사 정년 퇴임
 큰 형인 오성이 형님은 집안의 장남으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기대가 높았던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 우리 형제 중 제일 똑똑했습니다.

 그 당시에 중학교를 졸업한 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차도 거의 없고, 차비도 아껴야 해서 예천까지 30리를 걸어 다녀야 했던 형님은 점심 도시락도 여문 박의 윗부분을 잘라서 거기에다가 밥을 넣고 볶은 콩가루를 묻혀서 다녔습니다.

 형님은 그렇게 열심히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고등학교로 입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그해 8월 남쪽으로 남하하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셨습니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 전투에 필요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인근 지역의 젊은 학생과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9살이었고, 형님은 18살이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북한이 점령했던 인민군 시대였습니다.

 누가 형님을 납치해 갔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당시에 동네에는 좌익사상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총 책임자로 있는 한 명이 우리 집 앞에서 한 2백m 떨어진 장터의 호두나무집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한 명도 같은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한 동네 사람이니 동네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고 모이라고 하는데 안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 사람들을 데려갔습니다.

 형님도 '소집 명령'을 듣고 학생복을 입고서 집을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가지 않으면 총살이니까.

 그 때 형님이 아버지께 간다고 이야기하고 가셨는데, 아버지는 '가지마라, 피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히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형님 말고도 10여명의 청년들이 함께 갔는데,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 때 도망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청년들은 거의 다 갔습니다. 당시 북한군이 쳐내려올 때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예천군에서만 6백여명이 징집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천군이 낙동강으로 침입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형님이 끌려가신 뒤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된 형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B29 1백대가 떠서 포탄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가족들은 그저 그 때 형님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짐작만 할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평생 돌아오지 않는 큰 아들을 그리워 하셨습니다.

 그 때 끌려가지 않았다면 큰일을 했을 큰형님.

 그런 형님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다 2008년 10월 이산가족 상봉 당시, 저희 형님과 함께 인민군에 끌려 가셨던 사촌 형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사촌 형님인 권오덕 형님이 북측의 1백명에 뽑혀서 금강산에서 남측 가족들과 만나셨습니다.

 오덕 형님은 바로 이웃에 살았던 분으로, 저희 형님보다 한 살 많으신 분입니다.

 그때 오덕이 형님이 평양에서 저희 형님을 만나셨다고 하시며, 형님이 평양에서 생활하시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오덕이 형님께 오성이 형님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더니 그것도 사연이 기가 막혔습니다.

 당시 세 번에 걸쳐 끌려 가셨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납치된 사람들끼리 서로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 형님과 오덕 형님도 처음에는 서로 생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평양의 어느 회사에서 근무를 하시게 되었는데, 점심시간에 누가 고향을 물어서 고개를 돌리니 오성이 형님이었다고 합니다.

 오성이 형님 말로는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데 얼핏 보니까 사촌 형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봤는데 확실하지가 않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오덕이 형님께 "고향이 어디래요?"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덕 형님이 "고향은 왜 물어요?"하고 쳐다보셨는데 말하는 거랑 얼굴 모습이 확실히 사촌 형님인걸 확인하고는 "아이고, 오덕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오덕이 형님도 어릴 때 우리 형님 애칭인 '대로'를 부르며 "아이고, 대로야!"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으로 가셨을 때 총각이었던 형님은 평양에서 결혼도 하시고 자녀도 3남 2녀를 두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손자 손녀도 있구요.

 살아계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전쟁 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만 했던 형님의 생사를 그나마 알 수 있어서 또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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