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대대 운전병으로 6·25전쟁 참전
포병대대 운전병으로 6·25전쟁 참전
  • 예천신문
  • 승인 2017.06.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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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서본1리 윤진희 할아버지

 ▲윤진희 할아버지가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가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1월 2일. 당시 22살이던 윤진희(86·예천읍 서본1리) 할아버지가 입대한 날이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남과 북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는 모슬포 훈련소 또는 강한 병사를 길러내는 곳이라 하여 '강병대'로도 불린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 1연대 11중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9282152. 윤진희 할아버지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자신의 군번이다. '제주도 넓은 벌에 바람소리 굳세이니 한나라 젊은이의 구령소리 우렁차다'로 시작하는 '제1훈련소가'도 아직 잊지 않았다.

 60년이 훨씬 지났는데 정말 군가를 기억하느냐는 물음에 윤 할아버지는 이내 그 시절 훈련병으로 돌아간 듯 '제1훈련소가'를 씩씩하게 불러보였다.

 윤 할아버지는 거기서 운전병학교에 차출돼 훈련을 마치고 부산보충대를 거쳐 21사단 183 포병대대 수송 소대에 배치됐다.

 그는 휴전되기 두어 달 전부터 105mm 견인포 운전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군용 트럭에 105mm 포를 달고 이동하다 특정 지점에 정확히 포를 위치시켜주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를 괴롭힌 것 중 하나가 사람보다 큰 쑥대였다. 쑥대에 시야가 가려 어디가 논·밭두렁인지, 진창인지 구분이 안 돼 여러 번 애를 먹었다고 했다.

 1953년 7월 27일. 윤진희 할아버지는 휴전 되던 날 밤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인제군 북면 쪽이었지. 밤 9시 40분쯤 됐는데 병사들 모두 야전삽과 곡갱이로 포탄통을 부수다시피 열고 포탄을 꺼내느라 정신이 없었어.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포탄이 날아다녔지."

 남북이 평상시보다 몇 배 더 많은 포탄을 쏘아대던 그날 밤 중대장으로부터 거짓말 같은 정전 소식을 들었다. 윤 할아버지를 비롯한 병사들은 모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며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이날 밤 10시를 기해 155마일 전선에서 마침내 총성이 멎은 것이다.

 "총성, 포성이 멎자 그동안 제대로 듣지 못했던 도랑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마구 들리는 거야. 고향 생각도 사무치게 떠오르고……."

 윤진희 할아버지는 47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1956년 11월 20일 병장으로 전역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두 살 아래 약혼자인 권순이 씨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결혼식을 치렀다. 령 슬하에 2남 3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그는 안동서후우체국장으로 재직하다 1990년 6월  퇴임했다.

 그는 6·25참전유공자회 군지회 사무국장, 무공수훈자회 군지회 사무국장을 각각 7년 넘게 맡아보는 등 보훈단체 발전과 회원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윤진희 할아버지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타협이 안 돼. 6·25 전쟁 때 겪어보지 않았나? 21세기에 3대 세습에다 신격화, 우상화가 말이 되나? 젊은 세대가 공산주의 실상을 바로 알고 애국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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