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왕소나무 처럼
소백산 왕소나무 처럼
  • 예천신문
  • 승인 2017.12.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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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 운평 김낙준 회장

 김낙준 회장은 어머니같이 포근한, 하늘에 뜬 백자 달항아리 같다. 책에 대한 생각도 출판 경영의 원칙도 나는 그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내가 따를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것은 그의 인품의 넓이와 깊이이다. 능력 있는 인재를 아끼고 존중하며 대인 관계에서도 지극정성을 다한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발소리도 마음가짐도 조심스럽다.

백자철화천상하문달항아리(17세기)

안경을 벗은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 영락없이 정겨운 이웃 아저씨이다. 시골 면장이나 군수가 서울로 나들이 온 것 같다. 24시간 웃는 바탕이다. 한일자로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넓은 이마에 경영자의 예리한 눈빛이 번뜩이지만, 손을 내미는 순간 눈 녹듯 녹는다.

백자청화운용문대호(18세기)

그는 경북 예천군 하리면(현재 은풍면) 우곡리에서 태어났다. 어진 산과 물 맑은 은풍골이었다. 합창김씨의 아버지 김경흠과 어머니 전일승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서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후 초등학교를 겨우 마쳤다. 나라를 잃고 말과 글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일제 강점기에 큰댁 김진봉 공의 양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살았다.

'책의 해'조직위원회 현판식 (2006)

그러다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구 문화서점에 들어갔다. 이설주 시인이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시인의 부인이 경영하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는 삶의 의미를 글자 속에서 찾고, 눈물과 고통은 책갈피 속에 묻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던가. 출판과 서점 운영을 익히며 사명감으로 큰 뜻을 품었다. 출판의 청사진을 그리게 된 것이다 

금성출판사와 KBS가 주최한 어린이 백일장 (1996 )

대구를 떠나 상경한 그는 1965년에 새벽을 알리는 샛별 같은 금성출판사를 만들었다. 살면서 어찌 시련이 없으며 눈앞이 캄캄한 좌절이 없었으랴. 그는 거센 파도와 비바람을 헤치고 하늘이 준 뛰어난 재능과 지혜, 불굴의 의지와 명석한 판단력으로 이 나라 출판문화의 한 획을 그었다. 이 나라 출판문화의 새벽 별로 떠오른 금성출판사는 교과서, 사전, 인문, 교양, 아동 등 한국 최고의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서울 국제도서전 전시장 참관 (1995)

어린 날 홍수에 떠내려갔던 예천군 은풍골 앞개울에 은풍교 다리도 놓았다. 또 시인 김영진의 「지혜 샘 예천 이야기」 2백23쪽 컬러판 2천 부를 발행하여 고향의 중요 기관에 보내 주었다. 중국 용정에 윤동주 기념관을 세우고 협주단 지원, 금성문화재단도 설립했다. 동화 작가 발굴, 전국 어린이 글짓기대회, 국민 독서경진대회 등을 주관하면서 책 읽는 국민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푸르넷 교육 서비스 사업도 활발하다.

복원된 윤동주 기념관 (1996)

김낙준 회장은 대한출판문화협회장, 책의 해 조직위원장, 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그런 그가 세계의 문화유적은 물론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보면서 5천 년 민족 예술의 문화적 의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한 위대한 출판인이 문화유산 지킴이로 다가온다. 출판 경영의 달인이 문화재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이 동해에 등뼈를 세우듯 청자와 백자를 모으면서 생각이나 사물을 보는 혜안도 전문가 못지않게 밝아졌다.
한국 미술의 우수성과 불가사의를 훼손되고 유실되고 유출되기 전에 한데 모아 지키고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깨달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간송(澗松)이 나서서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켜냈고, 광복과 전쟁 후에는 호암(湖巖)이 흩어진 고미술품을 한데 모았다.

그가 청자, 백자 등 고미술품을 수장하면서부터 철학과 사물을 보는 눈도 한층 밝아졌다. 우리 문화재에 열정을 쏟은 덕분에 도자기를 비롯한 분청사기는 물론, 고미술과 근대 미술까지 총망라하여 어느새 국보급의 소장가가 되었다.
<글: 김영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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