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서원에서 약포 정탁 선생의 혼이 되살아난다
도정서원에서 약포 정탁 선생의 혼이 되살아난다
  • 장귀용
  • 승인 2018.06.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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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정재학 청주정씨 군종친회장 나서 한옥스테이 등 문화공간으로 변신

정탁[鄭琢, 호는 약포(藥圃), 1526년(중종 21) ~ 1605년(선조38)] 선생은 외가인 용문에서 태어나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남명 조식 선생에게도 배움이 있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후 고향 예천으로 내려와 읍호정을 짓고 만년을 보내다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후 인조시기에 사당을 지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강당을 더해 도정서원으로 승격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약포 선생은 이 도정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임금으로부터 위패와 신주를 옮겨 묻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위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제를 올리고 있다.

약포 선생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 등이 참소로 인해 화를 처할 뻔할 때 마다 상소를 올리고 진언을 올려 구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나를 천거한 사람은 서애(류성룡) 선생이며, 나를 구한 이는 약포선생이다"라고 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이 참형에 처해지지 않고 백의종군하게 해 '명랑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왜군을 물리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초서(草書)'의 달인으로 불리었으며, 당대에 서애 류성룡과 소재 노수신과 함께 영남 3대가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예천에서는 약포 선생의 충의사상, 도시복 효자의 효도사상이 예천 충효 정신의 중심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약포 선생을 모시고 그 사상을 이어가는 호명면 황지리 도정서원(道正書院)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142호'로 지역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단청이 벗겨지고 후손들이 1년에 한두 번 모여 제를 올리는 것 외에 활용되지 못해, 점차 허름해져가 약포 선생의 위명도 세간에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손 정재학(청주정씨 예천군종친회장) 씨는 퇴직 후 도정서원의 관리를 자임하고 나섰다.

 

손수 나서서 건물 곳곳을 보수하고 청소하여 새롭게 꾸미던 중 도정서원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서 약포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3년 전이다.

 

이후 현대식 화장실을 짓고 잡목과 잡초를 제거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인 끝에 도정서원을 한옥을 경험할 수 있는 한옥스테이로 변모시켰다.

 

정재학 씨는 "한옥스테이를 통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게 아니다. 도심지에 살면서 유교정신, 특히 약포 선생이 보여준 충의사상을 널리 알리고, 자신에게 충실하고 공동체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열정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씨가 이런 지역문화형성에 힘쓴다는 것을 알게 된 지역 청년들이 법인을 제안해와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노년 도슨트(문화해설사)'와 '청년 문화인'을 채용해서 지역공헌을 하는 단계까지 꿈꾸고 있다고 한다.

 

경북도청신도시와 예천은 앞으로 고유한 문화가 간직한 옛 가치와 혁신적인 새 가치가 길러질 산실이다. 이런 비전속에서 옛 가치를 되살려내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예천에는 많은 문중이 있고 고택들이 있는 만큼 앞으로 이러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들에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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