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버린 무소유의 언어
집착을 버린 무소유의 언어
  • 예천신문
  • 승인 2003.04.0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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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생동의 계절이다. 생동은 싱그러움이자 회태(懷胎)이다. 태어남은 소멸의 전제이련가.
지난달 29일, 우리나라 불교계의 한 거목 서암(西菴)스님이 입적하였다.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과 제8대 종정을 역임한 서암은 본명이 송외영이다. 후에 홍근(鴻根)으로 개명하였다. 법호가 `서암'임은 서악사에서 화산(華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연에서 지어진 것이다.

스님의 본적은 예천읍 노상리 5번지이고, 풍기 금계에서 출생(1918년)하였다.

외가인 안동 녹전면 구송리에서 자라다 아버지 송동식(宋東植)이 항일 독립운동을 한 관계로, 그의 유년시절은 영주, 안동, 단양, 예천을 떠도는 참담한 유랑생활이었다. 단양 대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예천 대창학원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였는데, 타고난 영민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천재소년이라 하였다.

16세(1932년)의 나이에 예천읍 서악사(西嶽寺:옛이름 서암)에서 출가하여 3년간 머슴과 같은 고된 행자생활을 하였다. 이어 문경 김용사에서 사미계를 수계하였다.

그 뒤 일본 어느 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다가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귀국하여 곧바로 모교인 대창학원에 돌아와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신념으로 교사생활을 1년간 하였다.

이 때(1941년) 그의 나이 25세였다. 지금도 대창중고등학교 교직원 명부에는 그의 이름석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인연으로 인해 `民族精氣'라는 붓글씨를 대자로 써 이 학교에 기증하니 지금도 송대 교장실에 걸려 있다. 스님은 말년에 봉화의 선달산 자락에 자리잡은 무위정사(無爲精舍)에서 수행의 마지막을 보내다 와병으로 최근, 조실로 있던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에 앞서 스님에게 제자들이 간청하였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 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그렇다. 스님이 남긴 마지막 말, 임종게에서도 `집착을 버린 삶이 이룩한 무소유'의 언어였으니, 인간이 만족 모르면 세상살이가 칼날밟기 같다고 한 스님의 법어가 지금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려 온 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다.

<조동윤, 예천군청 총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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