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을 위해 학문에 전념 '논문 발표·사적 연구 등 헌신'
민족해방을 위해 학문에 전념 '논문 발표·사적 연구 등 헌신'
  • 예천신문
  • 승인 2021.04.28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물/ 예천이 낳은 국문학의 개척자 도남 조윤제 박사
1904년 지보면 지보리 출생, 경성제국대학 제1회 문과학생
◇조윤제(趙潤濟·1904년 ~ 1976년).
◇조윤제(趙潤濟·1904년 ~ 1976년).

예천군을 충(忠) 효(孝)의 고장이라고 한다.
충은 이순신을 구한 약포(藥圃) 정탁(鄭琢)대감을, 효는 효자 중의 효자 명심보감에 나온 야계 (也溪) 도시복 (都孝子)를 말한다.
그동안 예천군은 지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선현 발굴과 충·효정신, 선비정신, 동학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정립해 나오고 있다.
15세기 예천군은 야은 길재, 강호자 김숙자,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등이 활약한 선산과 더불어 퇴계 이전에 유학의 중심지였다.
예천 출신의 유학자인 송정 조용 16년, 별동 윤상 16년, 나암 이문흥(1423(세종 5)∼1503(연산군 9) 20년 등 50년 이상 조선 초의 유학과 문묘의 관리를 맡은 성균관의 책임자인 정3품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이 되어 조선의 학문을 책임졌던 인물들은 모두가 예천 출신의 유학자였다. 또 법조인, 경제인, 문학인, 장성, 학자들이 인구비례 타 시·군에 비해 월등히 많이 배출된 곳이다.
예천 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인 국문학의 개척자인 조윤제 박사를 소개한다.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출생으로 민족과 통일을 위한 학문에 전념했던 도남 조윤제(趙潤濟·1904~1976) 박사는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도남(陶南)이다.
아버지 용범(鏞範)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 생으로 문과에 입학했다.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됐다.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 일제 때, 중등학교의 교원)로 임명돼 그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晉泰)와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 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견해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 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지냈다.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대학원장과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했다.
그의 저서로는 일제하에서 자비로 출간한 '조선시가사강'(1937)을 필두로 '교주 춘향전 校註春香傳'(1939)·'조선시가(朝鮮詩歌)의 연구'(1948)·'국문학사 國文學史'(1949)·'국문학개설 國文學槪說'(1955)·'한국 문학사 韓國文學史'(1963) 등 20여 권에 이른다.
논문으로는 1929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조선문학과 한문학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50여 편, 수필·잡문 등은 거의 100편에 이른다. 도남은 경성제국대학 조선 문과 제1회 단 한 사람의 학생으로 입학 졸업한 분으로, 우리나라 국문학 연구의 개창자이다.
그는 당시 출세가 보장되는 법과나 의학부를 지망하지 않고, '망국의 어문'인 조선어문학과를 지원하여 외롭고 힘든 길을 선택해, 민족을 위한 학문이 독립을 위한 길이라 여기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1926년 비밀결사를 조직해 순종의 장례식 때 폭동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리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만주의 고려혁명당을 찾아서 망명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우리나라 민족정신의 결정인 고전문학의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
졸업 후 도남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수로 임용되어 3년간 연구실 생활을 하며 학자로서의 기초를 착실히 다지는 한편, 1931년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후배들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국문학 잡지로서는 최초인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했다.
1934년 도남은 계몽주의적 사조에서 탈피해 실증적인 과학적인 학문을 하자는 것과 일본에 대한 학문적인 항쟁을 하고자 이병도, 송석하, 손진태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을 주장했다.
1937년 '조선시가사강'을 저술해 국문학 역사상 개척 적인 업적을 세웠고, 1949년 '한국 문학사',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개설' 등 사대 저서를 남겼으며, 서울대, 성균관대, 영남대학의 교수와 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학계 활동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도남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가 단순한 학자에 그치지 않고, 민족 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특히 1948년 김구, 조소앙의 남북협상에 동행하고 4·19혁명 때 대학교수단 시위를 주도하고 그 이후 고조된 통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1965년 한일 협정 비준 때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했다. 이같이 도남은 우리나라 국문학연구의 개척자이자, 오로지 민족과 통일을 위한 학문에 전념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도남 조윤제(陶南 趙潤濟) 박사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도담학회(이사장,이동영·李東英)에서 중견 국문학자에게 도남 국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