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요의 맥 끊어지지 않게 전수, 관광상품 됐으면…
농요의 맥 끊어지지 않게 전수, 관광상품 됐으면…
  • 예천신문
  • 승인 2021.06.07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예천통명농요 보유자 안용충 씨
▲중요무형문화재 제84-2호 예천통명농요 보유자인 안용충 씨와 부인 최숙이 씨. 문화재청은 지난 2006년 안씨를 보유자로 인정하면서 '초창기 회원으로 모든 뒷소리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업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 농요가 몸에 배어 있고, 징을 다루는 솜씨는 향토성이 짙다. 그동안 연마한 기량이 원숙하며 예천통명농요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4-2호 예천통명농요 보유자인 안용충 씨와 부인 최숙이 씨.
문화재청은 지난 2006년 안씨를 보유자로 인정하면서 '초창기 회원으로 모든 뒷소리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업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 농요가 몸에 배어 있고, 징을 다루는 솜씨는 향토성이 짙다.
그동안 연마한 기량이 원숙하며 예천통명농요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6년 8월 16일. 예천읍 통명리 안용충(安龍忠) 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4-2호 예천통명농요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날이다. 그의 나이 68세 때다.
현재 주민등록상 나이는 83세, 본래 나이는 이보다 네 살 많은 87세다.
보청기를 껴도 잘 들리지 않는 귀, 침침해진 눈, 흐릿해지는 기억, 위암 수술 후 바깥나들이조차 쉽지 않은 체력….
안용충 씨도 이렇듯 흐르는 세월을 비껴갈 수 없었다.
"자네는 내하고 같이 가야 하네…."
안씨는 이웃 권오환(작고) 씨의 권유로 예천통명농요에 발을 들였다. 지금까지 60년 넘게 농요에 빠진 인생길을 걸어온 셈이다.

그에게 통명농요는 초창기 여러 회원처럼 삶의 전부였다.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 어려운 처지의 소작농이었지만, 통명농요와 관련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논에서 써레질하다가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2남 3녀, 자식 공부시킬 형편조차 안 돼 아내(최숙이·79)는 쉰 살 언저리에 도망치듯 서울로 갔다. 몸이 아파 다시 시골로 올 때까지 식당에 딸린 방에서 5년 동안 갖은 고생을 겪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허물없이 지내던 사촌형님마저 "농사를 그렇게 열심히 지었으면 이내 부자가 됐을 텐데"라며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안씨는 예천통명농요가 제2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지난 1979년의 무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벅찬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미국·일본·중국·캄보디아 등 해외 공연도 많이 다녔다.
현지인들이 통명농요 가락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문화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씨는 예천통명농요를 알리는데 작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난 삶이 보람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몇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통명농요에 주저 없이 뛰어들겠다고 했다.
"더는 공연에 참여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통명농요의 맥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전수되고 예천의 독특한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천통명농요에 대한 안용충 씨의 열정은 아직도 펄펄 끓는 용암처럼 뜨겁기만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