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손꼽아 기다립니다. 예천 발전상, 이웃들 밝은 이야기 많이 담아주길…"
"매주 손꼽아 기다립니다. 예천 발전상, 이웃들 밝은 이야기 많이 담아주길…"
  • 예천신문
  • 승인 2022.07.1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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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5일 '예천신문 창간 또는 초기부터 구독한 열혈 독자'

1992년 2월 26일 예천신문 창간 준비호가 발행되고, 3월 5일 창간호를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예천신문이 2022년 7월 14일 1500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지역신문으로서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30년 동안 꾸준히 발행해 올수 있었던 것은 모두 예천신문을 아끼며 구독해주신 구독자 여러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구독자이지만 저희 신문과 오랜 인연을 이어오신 구독자 몇 분을 감사한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앞으로도 항상 저희 예천신문을 아껴주시고 아낌없는 충고와 조언 부탁드립니다.

◆부산 금정구 정오식(77·용문면 선리 출신) 씨

"아주 오래전에 고향 소식을 전해주는 게 고마워 예천 갔을 때 일부러 신문사를 찾아간 적도 있어요. 저는 고향소식은 거의 예천신문으로 봐요. 예천신문 저는 무지하게 기다립니다."

부산에 사는 정오식 씨는 특히 출향인들의 소식을 재밌게 읽는다고 꼽았다.

"예천신문 첫 장부터 쭉 훑어보죠. 그런데 특히 출향인들 기사를 좋아해요. 예천에서 나가 객지에서 직장에 높이 있든가 공장을 한다든가 이런 소식이 좋습니다. 고향 분들이 나가서 출세하고 이런 게 보기 좋아요."

특히 자신이 아는 사람이 신문에 실리면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다.

"아쉬운 건 전보다 출향인 소식이 적은 게 조금 아쉽네요."

예천신문 발행 초기부터 꾸준히 예천신문을 구독해온 정오식 씨는 용문면 선리 출신으로 예천중학교와 예천 농고를 졸업했다.

◆보문면 수계리 김옥현(68) 씨

예천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창간 준비호나 창간호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까?'싶었는데 보문면 수계리 김옥현 씨 집에서 귀한 창간 준비호를 볼 수 있었다.

"수집이 취미다 보니 이렇게 가지고 있는데 창간호와 2호도 있는 줄 알았는데…. 하필 1, 2호가 없다니 눈물이 나네요."

아쉽게도 김옥현 씨의 집에서 1, 2호는 볼 수 없었지만, 창간 준비호를 비롯해 예천신문 3호부터 1499호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신문을 잘 보지 않고 모으기만 했는데 나이가 드니 요즘엔 신문을 봐요. 저는 박서보미술관 건립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기사를 꼼꼼히 챙겨보고 권창륜 서예가의 기사도 잘 챙겨봤습니다."

보문면 수계리의 김옥현 씨는 예천신문 외에도 예천과 관련된 다른 소중한 자료들도 수집해 간직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행된 예천신문을
담아 둔 종이상자.
▲김옥현 씨가 보관 중인 창간 준비호
▲김옥현 씨가 보관 중인 창간 준비호

 

 

 

 

 

 

 

 

 

 

◆서울 구로구 이명식(69·예천읍 서본리 출신) 씨

국가철도공단에서 정년퇴직하고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이명식 씨는 퇴근 후 따로 컴퓨터를 켜지 않아 우편으로 오는 예천신문을 더 많이 보게 된다.

"형수님이 임경희 씨입니다. 예천신문에 시가 몇 번 실린 적 있고, 조카가 경북도청 신도시에서 '이진아심리상담소'를 개업해서 제가 예천신문에 광고를 내준 적도 있습니다."

아직 친척들이 예천에 많이 살고 있지만, 고향소식을 신문으로 많이 듣는다는 이명식 씨는 긍정적인 소식이 많이 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은 고향의 발전된 모습을 많이 보고 싶답니다. 새롭게 어떤 사업을 벌인다든가, 또는 미담 같은 것,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소식이 많이 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직 고향 사람들 인심도 살아 있고 세상 살아가는 맛이 나고 서로 위해 주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습니다."

예천읍 서본리에서 살았던 이명식 씨는 예천에서 대창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영주교육청에서 근무하다 국가철도공단에서 정년퇴직했다.

◆서울 금천구 황만호(73·예천읍 생천리 출신) 씨


"제가 재경예천동부초, 예천중학교, 예천농고 회장하고 총무를 오래 하면서 모임 활성화에 애를 많이 쓰다 보니 예천신문을 초창기 때부터 봤습니다."

대한전선에서 40여 년간 근무하고 정년퇴직 후 당진에서 에스케이이전선(주) 부사장으로 근무 중인 황만호 씨는 서울 집으로 가는 주말이면 예천신문을 챙겨본다.

"저는 최혁영 선생의 칼럼에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좋아해요. 또 창원에 계신 이상연 선배님, 가끔 뵙기도 하지만 신문에서도 자주 봐요."

황만호 씨는 중학교 시절 한 학년이 3백50∼3백60명 될 정도였는데 인구가 감소하면서 후배들도 많이 줄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후배들이 많이 줄다 보니 타지에서 고향 사람들의 모임도 활성화가 조금 덜 됩니다. 그래도 예천이 인재의 고장인데….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고향 모임이 더 활성화되고, 사람들이 예천신문도 많이 보고 그래서 예천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천농고 졸업 후 1970년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한 황만호 씨는 예천읍 생천리 출신이다.

◆서울 관악구 신숙조 씨 (82·호명면 출신)

서울 신림동 신숙조 씨는 용문면 출신의 남편인 고(故) 박경철 씨와 함께 예천신문을 오랫동안 구독해 왔다.

"우리 둘 다 예천사람이죠. 남편이 공무원이었는데 예천신문을 같이 봤어요. 지금은 저 혼자 보는데 1주일에 한 번 오는 게 아주 많이 기다려져요."

신숙조 씨는 신문사로 직접 전화를 해 1년에 4만 원인 구독료가 너무 싸다며 만류에도 5만 원을 입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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