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녕은 조선 초 격변기 속에서 스스로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보다 월등한 충녕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것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폐세자는 위험 인물로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충녕은 형을 믿었고 양녕 또한 오해받을 짓을 아니하였다.
그는 도성 내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한강 남쪽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동생인 상감이 국태민안하게 나라를 잘 다스려 주기를 빌면서 등을 돌려 남으로 내려 갔다하여 방배동(方背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번은 양녕이 한바탕 사냥을 끝내고는 둘째인 효령대군이 불도를 닦고 있는 회암사에 들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불도는 닦아서 무엇에 쓰려는가?’라고 물으니 효령이 ‘성불해야 한다’고 답하자 ‘그것 참 잘 되었다. 이 몸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느냐?’고 하면서 거리낌없이 인생을 살았다 한다. 결국 양녕의 지혜와 양보심이 아니었더라면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없었을 것이며, 형제간의 우애와 금도가 없었다면 따뜻한 일화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국가장래에 큰일을 위해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국민 모두가 수긍이 가는 고도의 지혜를 모아 과연 무엇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대절명의 과제인가를 판단해 먼 훗날에도 후회하지 않는 결론을 도출하여 선진대열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윤정, 왜관중앙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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