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이 지나고 해님이 뉘엿뉘엿 꼬리를 내릴 즈음이면 그림자처럼 조용하신 내 할머니께서는 우물 옆 작은 꽃밭에서 조심스레 봉선화를 따셨어요.
빨간 꽃잎과 연한 잎을 함께 따서 따끈따끈하게 달구어진 장독 위에 가지런히 수를 놓듯 펴널었지요.
반들반들 까만 질그릇 장독 뚜껑 위에서 새들새들하게 곤 봉선화를 깨끗한 빨랫돌 위에 얹어서 아이 주먹만한 결이 고운 돌맹이로 백반과 함께 곱게 찧은 다음 이 빠진 하얀 사기 그릇에 담으셨어요.
저녁상을 물리신 할머니께서는 오이씨 만한 내 손톱 위에 곱게 찧은 봉선화를 쑥 뜸 말 듯 잘게 뭉쳐 올리시고 곱게 물드라고 아주꽈리 잎으로 정성껏 싸서 무명실로 묶어주셨지요. 아주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이….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 빠져버린 난 몇 번씩이나 같은 이야기를 청해 듣다가 잠이 들기도 했고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과 옛날 옛적 이야기에 길 잃은 나무꾼의 길잡이가 되었다는 북극성도, 떨어지는 별똥별에게 소원을 비는 것도 어린 시절 내 할머니와 함께 한 여름밤의 별자리 체험 공부였습니다.
안동포 넓은 치마 폭 속에 모기 몰래 손녀 다리 꼭꼭 감춰 주시고, 거친 잠에 봉선화 빠져 버릴까 살랑살랑 부채 바람에 자장가 실어서 밤새 옆에서 지켜보시던 내 할머니.
곱게 물든 작은 손톱을 단정하게 깎아주시고, 온갖 투정 다 받아 달래시면서 긴 머리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려서,나풀나풀 깡충깡충 나들이 가는 손녀 배웅해 주셨어요.
단정하신 몸가짐과 깊고 넓은 사랑이, 맑은 정신으로 욕심 없는 마음이 부처님을 닮아서 두고두고 못 견디게 그립게 하는 내 할머니.
할머니의 정성과 섬세한 솜씨로 남겨진 고운 모시 조각보를 꺼내 보면서 훌쩍 지나버린 세월 속에서도 봉선화 피는 여름만 되면 새록새록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변혜영, 용문초등 37회, 예천여고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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