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기찻길 추억
고향 기찻길 추억
  • 예천신문
  • 승인 2005.08.2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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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오랜 옛날 소꿉놀이 하던 소녀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초여름이었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세살 아래 남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읍내에서 외각에 위치한 기차역으로 나갔다. 대합실은 한산했다. 개찰구 밖 철길 옆 화단에는 봉선화, 금잔화, 맨드라미 소박한 화초들이 피어 있었다. 한참만에 기적을 울리며 흰 연기를 뿜고 증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나는 난생 처음 타보는 기차였다. 콩당콩당 가슴이 뛰었다. 경북 성주에 있는 외가에 다니러 가는 길이었다.
흐르는 물처럼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차창 밖은 낯선 풍경들이 얼핏얼핏 필름 돌아가듯 한다. 연방 새로운 장면들이 번갈아 시야에 들어와 뱅뱅 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지럼증이 일 것만 같다. 그것은 어린 눈높이로 부딪히는 시각에서 갖가지 새로운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기한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리라.
이를 테면 낙동강 철교가 무지무지하게 크고 엄청 높고 대단히 길어보였다. 또한 버스를 타고 달리는 뽀얀 흙먼지 자욱한 신작로 시골길은 흡사 지구 끝처럼 아득하고 한없이 멀기도 했다.
언제 외할머니댁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포물선길을 따라서 가도가도 그 자리에 되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루하고 졸음이 왔다. 그 훗날 내가 60대에 접어 들기까지 세상이 수십 번 곤두박질 치고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세월의 변화를 겪는 동안 지금껏 단 한번도 고향기차역 근처에 가 본 일이 없었다. 아니 기억에서조차 기차역의 존재를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뒤에 그 기찻길이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43년 2차 대전 말기 즉 일본제국말기에 그 철로가 폐쇄되었다가 6·25사변을 치르고 난 후 1966년 예천∼영주와 점촌∼예천 노선이 재개통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금년 여름 대구에 있는 친구를 방문했을 때 마침 고향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 친구에게 나는 문득 “우리 오랜만에 기차 편으로 고향 가자”고 했다. 그 순간 잔잔한 그리움이 뇌리를 스쳤다. 아득히 꿈속같은 그 시절 외가에 가던 기찻길이 떠올랐던 것이다.
대구에서 상행선 무궁화호를 탔다. 꼭 63년만에 고향을 향해 추억을 싣고 철마는 달리고 있었다. 아련한 꿈이 묻어나는 고향길의 철로는 경북북단을 누비는 경북선이다. 논배미 사이사이마다 한창 푸성귀가 무성하고 철도변 인기척 없는 외딴집 뒤뜰엔 제홀로 노란 호박꽃 넝쿨이 허드러지게 담을 타고 있다. 한폭의 유화 같은 시골풍경을 한가롭게 감상하는 동안 기차는 낙동강 철교를 지났다.
이 철교는 ‘콰이강의 다리’로 불릴 만큼 악명 높은 낙동강 전투로 유명하여 6·25 전사에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낙동강 전투는 이 나라를 지키는 아군의 교두보였으며 최후의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50여년 전의 참상들이 오버랩 되는 가운데 열차는 무심하게도 지난날 아픈 역사의 참상들을 싣고 유유히 달려갔다. 이제 고향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나보다. 차창 밖으로 왜관, 김천, 상주, 함창, 점촌, 용궁 일련의 익숙한 역명들이 플랫폼을 잠시 정차하거나 아니면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휙휙 자나치고 있다.
참 오랜만에 친지 얼굴을 가까이서 대하듯 반가움이 앞선다. 아, 동구 밖 울타리길을 돌아 집으로 가는 기분이다. 하염없이 차창 밖을 기웃거리며 옛날을 헤매고 있는 사이 어느듯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제서야 옆자리에 앉은 잠 많은 친구가 부스스 눈을 떴다.
여전히 작고 고즈넉한 시골역, 그 옛날 나 어릴 적엔 서울역 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던 내 고향 예천 기차역이 아니었던가.

<박경옥, 자유기고가, 예천읍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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