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지가 된 옛 시느리 장터(1)
유원지가 된 옛 시느리 장터(1)
  • 예천신문
  • 승인 2006.08.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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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은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를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햇빛을 가려주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발 디딜 틈이 없이 모여들고 있다. 새로운 피서지가 되고  놀이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원지로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학가산이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고 유유히 굽이쳐 흘러내리는 맑은 내성천을 가로 질러 건너가는 고속도로 교량이 위치한 곳이다.
해수욕장을 능가하는 피서지가 되어 많은 인파를 이루면서  더위를 잊은 채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천혜의 명소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봄이면 넓게 펼쳐진 은모래 자갈 위에 종달새가 알을 낳고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공중높이서 지저귀고 있는데 맑은 물속에는 언제나 은어, 피리, 모래무지 등 물고기가 노닐고 있다. 건너편 물가 석벽에서 긴 부리를 뽐내는 빨간 깃의 물총새는 이들을 노리고 물속을 바쁘게 드나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곳을 즐거이 이용하고 있건만 여기가 그 옛날 보부상들이 오늘의 피서객 만큼이나 많이 모여들면서 성시를 이뤘다는 역사적인 사실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로서는 이러한 점을 너무나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곳은 6·25동란 전까지 당시 십여 가구의 주택이 산재하여 있는 한적한 동리로서 시느리 장터라고 불러왔던 곳이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마지막 살았던 사람으로서 한때의 민속적, 역사적 사실을 오늘에 조명해 봄으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그 옛날을 투시하고자하는 책임과 의무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전설이 아닌 하나의 실제 사건과 사실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하는 강한 소명의식(昭明意識)을 갖는다.

이곳은 조선조 후기(1770년)부터 일제강점 초기까지 약 1백50년간 시장터로서 저자를 이루던 번잡한 촌락이었다.
교통 발달과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화의 거점지가 바뀌고 변천됨으로 그 옛날의 영화와 번영도 아득한 잔영으로 남아있거나 아니면 흔적조차 없는 옛이야기로 전해오는 곳이 여기뿐이리오 마는 변천과정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옛날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고 하는 것은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지혜라 생각되어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승욱 씨 / 보문면 출생, 감천면에서 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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